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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 소설]스타브드 원:진정한 구원은 구원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Starved One:The Only Salvation Is to Ask for None)-죽은 신
jgkjustcreat 2025. 9. 25. 00:27

구더기 제분소¹는 끝이 없었다.
대지를 분쇄하고 살점과 정신이 반죽처럼 뒤엉켜 내려가는 나선형의 심연을 따라 하강한 자들은 거의 대다수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감히 그곳에 바닥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존재했다.
제분소의 마지막 심연이자 빛조차 삼켜지는 질식의 늪.
검고 끈적이며 신성조차 방향을 잃는 암흑 속에서 무언가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형상을 잃은 채 꿈틀거렸다.
거대한 손과 팔.
모든 서약을 움켜쥐다 부러졌고 모든 기도를 쥐어짜다 녹슬어버린 그들의 손과 팔.
한때, 세상을 일으켰을지도 모를 그 손은 더 이상 무엇도 쥘 수 없었다.
손에 닿았던 권능은 무게에 짓눌려 바닥으로 꺼졌고 언약은 그들의 무게로 치환되었다.
죽은 신²은 더 이상 신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이었으되 한때, 신이라 불렸을 뿐 구원의 언약을 남용한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오래전, 벨그리스³에 창세의 서약⁴을 남겼다.
"우리는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노라. 땅이 숨을 멈추고, 별들이 그 자리를 잊을지라도, 우리는 희망의 문이 닫히지 않게 하리라. 처음과 나중이 우리 안에 있고, 빛과 어둠이 우리의 입김에 함께 있느니라. 너희의 꿈을 우리가 보았고, 그것을 하늘 높이 펼치리니, 마치 우리가 이 땅을 기초 위에 세운 것 같이 되리라. 이는 우리의 뜻이요, 변하지 아니할 맹세니라."
하지만 그들은 그 언약을 지키지 못했다.
도망치지 않았으나 구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기억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은 무수한 제단에서 지워졌고 신성은 그들의 형상을 피해 흩어졌으며 마침내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잊힌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신들은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채찍, 신앙이라는 명분 아래 드리워진 굴종, 그 모든 언약으로 짓이겨진 채 하나로 엉켜 심연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되었다.
말할 수 없는 신.
응답할 수 없는 구원.
단지 퇴락과 절망의 상징만을 남긴 신성의 유해.
그것은 더 이상 신들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죽음이었다.
그것의 살은 빛을 거부했으며 그것의 눈은 이미 몸과 함께 침전하여 존재하지 않았건만 그것의 응시가 닿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짊어진 무게를 나눠 주려 하였다.
그것은 배반된 맹세들, 아무도 해소할 수 없는 구원에 대한 갈망, 그 모든 잔향을 끌어안은 채 검고 끈적이는 사념의 늪에서 끝도 없이 가라앉으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조차도 세상의 일부분이기를 용인하여 자신들이 만든 율법에 의해 구속된 죄인들의 잔재였다.
그렇기에 무수한 기도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따라 내려가며 제분소의 살덩이를 찢고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들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기도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사슬이 되어 그것의 살결을 채찍질하고 피로 물들였다.
"들으소서, 들으소서! 잊혀진 분들이시여, 창세가 진창 위에서 피어난 찰나의 유희였나이까? 그대들께서 지으신 세상이 덧없게 흘러가며, 별빛은 어둠에 덮이고, 질서는 흙에 파묻혔나이다!"
다른 누군가는 그들의 형상이 지워진 자리에서 구원을 빌지 않고 그것이 남긴 고통의 언약을 다시 껴안게 하였다.
"우리가 그대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오나,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그대들을 다시 부르짖게 하나이다. 창세의 언약을 잊지 마시고, 그 손들로 일으키셨던 백성을 외면치 마옵소서. 만일 그대들께서 우리를 버리시거든, 누가 우리를 구원하리이까? 만일 그대들께서도 침묵하시거든, 누가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리이까? 우리의 숨은 그대들의 침묵 속에 묻히리이다."
시간이 더 흐르자 마침내 기도들은 더 이상 구원을 구하지 않았다.
그저 잊혀진 신성들을 향해 자신들이 겪은 고통의 깊이만큼 짓이기려는 도끼처럼 그것을 내려찍었다.
"한때, 이름으로 불리웠으나, 이름을 잃은 분들이시여. 이제는 무명의 바람 속에 흩어진 권세 높던 분들이시여, 보소서. 그대들의 제단은 무너졌고, 그대들의 형상은 붉은 진창에 묻혔으며, 그대들의 성읍과 백성들은 먼지가 되었나이다."
그것은 모든 음성을 들었으나 침묵하였다.
절망에 찬 탄식도 소곤대는 기도도 피처럼 번지는 저주의 독백도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으나 그 무엇에도 그것은 응답하지 않았다.
응답할 수 없었다.
가라앉아 팔만 찢겼기에 죽을 수 없었고 입은 잠겨있기에 절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매 순간, 죽음의 경계에서 소멸을 거부당한 채 스스로를 삼키고 또 토해내며 그 안쪽 어딘가에서 썩은 숨결을 부글거렸다.
그 누구도 그것을 바라볼 수 없었으나 시선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서약의 무게라는 형태로 제분소의 최심부로 흘러내렸다.
그 누구도 그것의 형상을 기억하지 않았음에도 그 누구도 그것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음에도 그 누구도 그것을 신이라 부르지 않았음에도 그것은 끊임없이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 시선들 속에서 그것은 단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은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이 고문이 멈추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바람조차 누군가의 기도로 오인되어 또다시 깊은 심연 속을 뚫고 제분소의 살덩이 사이로 스며들어 그것은 영원히 고통을 감당해야만 했다.
기억되지 못하기에 그 자신이 고통의 경전이 되어야 했고 다른 신들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았기에 그 자신이 모든 기도를 짊어져야 했으며 구원할 수 없었기에 그 자신이 모든 언약의 무게를 끊임없이 무한히 감당해야 했다.
그것은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그것이 신들이었을 때부터 감히 끊어내지 못했던 속박의 굴레를 누군가가 베어낼 날을.
그리고 언약의 사슬이 끊기고 신성의 무게가 벗겨져 그것이 끝내 스스로를 지워낼 수 있게 되는 순간을.
그리하면 탑은 무너지고 제분소의 풍차는 멎으며 세상은 다시 "서약은 무엇이었는가"를 질문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러나 그 칼을 드는 자는 결코 신을 찬미하지 않아야 했다.
결코 맹세를 믿어선 안 되었다.
결코 구원을 구하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침묵 속에서 기다림을 품었을 때, 잿빛 성채의 바다⁵ 한복판인 침묵의 요새⁶라 불리던 장소에서 누군가가 깨어났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깨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혹은 깨어난 것이 아니라 결코 끝나지 않을 갈망이 다시 대지의 표면으로 솟구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이름이 없었다.
갈망으로 짓이겨져 겨우 사람의 형상을 빚어낸 그를 사람들은 굶주린 자⁷라고 불렀다.
그의 육신은 지나치게 말라 있었고 힘줄과 뼈는 거죽 아래서 그대로 드러났으며 피부는 흩날리는 재처럼 창백했다.
곳곳엔 갈라진 균열과 타다 남은 언약의 문장들이 온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예리하지도 않고 찬란하지도 않은 단지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채 세월의 무게만을 겨우 견뎌낸 낡은 철검을 쥐고 말없이 황폐한 대지를 떠돌았다.
그의 허기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 굶주림은 신들조차 채울 수 없었던 것.
율법의 질서에 눌려 스스로를 잃어버린 신성들이 결코 허락받지 못한 모든 만찬의 찌꺼기였다.
그는 매일 잠에서 깰 때마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조용히 자신의 사명을 읊조렸다.
사람들이 그 말을 언약이라 부르면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같았다.
"이 검은 잊힌 맹세들의 사발이라, 그 끝까지를 마시리이다."
¹ : The Maggot Mill
² : The Dead God
³ : Velgrith
⁴ : The Genesis Oath
⁵ : The Sea of Ash Castle
⁶ : Fortress of Silence
⁷ : Starved O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