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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Work (38)
[무협 느와르 소설]살왕지로(殺王之路):그 사내가 강호를 살아가는 법-무독절구(無毒絶口)

밤은 눅눅했다. 비가 온 것은 아니었으나 냄새는 물먹은 흙처럼 습했고 창호지 바깥을 스치는 바람 또한 마른 바람이 아니었다. 사내는 거처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등잔불은 낮았고 방 안은 고요했다. 이따금 기름 타는 소리가 아주 가늘게 일었으나 그조차 적막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내는 곧장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밖의 기척 또한 재촉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은 수상했다. 다급한 전갈은 두드리는 법이고 위세를 믿는 자는 문을 밀고 들어오는 법이었다. 그러나 바깥에 서 있는 자는 둘 다 아니었다. 그저 안에 있는 자에게 제 존재를 한 번 드러내고는 다시 침묵 속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사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소..

Original Work/살왕지로 2026. 4. 2. 02:24
[무협 느와르 소설]살왕지로(殺王之路):그 사내가 강호를 살아가는 법-단수폐검(斷手廢劍)

사내는 이번의 목각 인형을 부서뜨릴 때, 기묘하게도 그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병장기가 맞부딪힐 때보다 더 서늘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리처럼 사내가 선호하는 살행 또한 그러했다. 실제로 검으로 피를 보기보다 검 이외의 것으로 피를 보게 만드는 방식. 물론 어느 쪽이든 끝내 피는 보게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누군가 꼭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목적은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인형 속의 첩지를 펼친 사내는 이번에도 표적보다 방략을 먼저 훑었다. ---------- 표적: 다수. 신분: 암막¹의 살수. 연유: 근래 암막이 본동의 행로와 거듭 겹치며 본래 본동에 흘러들어와야 할 청부까지 가로채는 형국으로 이를 더는 좌시할 수 없음. 무공: 주로 비응절심수²를 익히며 그 외에도 본동과 일맥을 ..

Original Work/살왕지로 2026. 4. 1. 03:17
[무협 느와르 소설]살왕지로(殺王之路):그 사내가 강호를 살아가는 법-차수절의(借手絕義)

며칠 동안의 향냄새가 여전히 몸에 자욱하게 배어있는 듯했다. 사내는 거처로 돌아와 젖은 소맷자락을 벗어 걸고 방 안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오래된 기름 냄새와 창호지 틈으로 스미는 바람의 냄새. 이곳에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그 바람처럼 벽에 배어들 뿐이었다. 사내는 방 한구석에 놓인 목각 인형을 집어 들었다. 단도가 나무를 쪼개자 속에 숨겨져 있던 첩지가 떨어졌다. 사내는 그것을 펼쳤다. ---------- 표적: 계석경. 신분: 천강문¹의 부총관. 연유: 백림맹² 내 흑도³의 간자를 색출하는 중임을 맡은 인물로 본동에 청부가 들어옴. 무공: 천강무을도⁴를 익혔으며 일신의 무예가 준수함. 방략: 지략이 뛰어나며 성정이 호방하여 원수가 별로 없음. 제왕루⁵를 자주 출입하나 여색을 탐하는 기미는 없음...

Original Work/살왕지로 2026. 3. 31. 20:22
[무협 느와르 소설]살왕지로(殺王之路):그 사내가 강호를 살아가는 법-수의동서(守義同逝)

밤은 깊었고 사내의 거처는 월광조차 숨을 죽인 듯 적막했다. 사내는 방 한구석에 놓인 목각 인형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투박하게 다듬어진 나무 얼굴은 눈도 코도 없었다. 다만 아무 표정도 없는 그 납작한 면으로 인형 또한 사내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사내는 말없이 단도를 꺼내 인형의 목덜미 아래를 비틀어 갈랐다. 마른 나무가 갈라지며 속이 드러났고 그 안에서 기름을 먹인 첩지 하나가 떨어졌다. 사내는 등잔불 가까이 가져가 첩지를 펼쳤다. ---------- 표적: 모청견. 신분: 모가장¹의 장주. 연유: 한때, 백림맹²에서 총외당주³ 직책을 수행하던 인물로 본동의 행사를 누차 방해함. 무공: 예한십삼검⁴을 익혔으며 일신의 무예가 고강함. 방략: 한도⁵를 떠나 세외에 은거하고 있으며 총외당주 시절의 직속 ..

Original Work/살왕지로 2026. 3. 31. 20:21
[좀비 아포칼립스 게임 판타지 소설]바이오 컨센서스:좀비 세계의 왕(BIO CONSENSUS:The King of the Zombie World)-튜토리얼

몸이 아주 느리고도 기이한 박자로 들썩인다. 마치 오래전에 멎은 심장이 뒤늦게 뛰며 낡고 해진 근육과 관절을 하나하나 흔들어 깨우는 듯하다. 몸이 한 번 꺾이고 다시 한 번 비틀린다. 내 몸은 내 의지와는 무관한 어떤 힘에 붙들린 꼭두각시처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경련한다. "쿠득, 쿠득… 쿠드드드…" 이 소리는 뼈가 맞물려 어긋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메마른 나뭇가지가 속에서부터 서서히 부러져 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아직 눈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이 미세한 파열음들은 이상할 만큼 또렷하다. 내 귓속으로가 아니라 신경을 타고 직접 나의 척추 밑동까지 기어들어 오는 것만 같다. 아, 이제 눈앞이 보인다. 손은 잘 움직이네. 아직 굳지 않은 피로 번들거리는 내 목의 찢긴 살갗 사이를 만져본다. 뜨겁고도 미끈한..

Original Work/BIO CONSENSUS 2026. 3. 28. 15:48
[좀비 아포칼립스 게임 판타지 소설]바이오 컨센서스:좀비 세계의 왕(BIO CONSENSUS:The King of the Zombie World)-새로운 세계

---------- 적합 개체 식별 완료 ---------- ---------- 동조 파장 수신 양호 ---------- 투명한 유리 조각이 공중에 떠오르듯 무수한 빛의 입자들이 깜박이며 단어들을 만들어낸다. 한 줄 한 줄이 허공에 새겨지며 이색적인 광채의 언어가 나의 시야를 점령한다. "즐거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러 핸드¹의 음성이 내 머릿속 어딘가 깊은 곳에서 울린다. 이전의 음색과 다르게 왠지 감정이 절제된 발성이다. 그리고 그 음성이 마지막 문장을 끝맺자 광각의 너머로 내 눈앞의 현실이 무너지고 새로 짜이기 시작한다. 눈앞이 점차로 어두워진다. 이 어둠은 단순히 빛이 꺼지는 것이 아니라 무채색의 정적 속에서 현실의 껍질이 벗겨져나가는 느낌이다. 귀 속의 소리마저 멀어지고 감각의 경계는 ..

Original Work/BIO CONSENSUS 2026. 3. 24. 14:39
[좀비 아포칼립스 게임 판타지 소설]바이오 컨센서스:좀비 세계의 왕(BIO CONSENSUS:The King of the Zombie World)-낯선 기계

오전의 일광이 고요한 물결처럼 거실 안으로 흘러든다. 유리창을 지나온 빛은 서늘할 만큼 또렷하고 그 안에 떠도는 먼지들은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천천히 허공을 부유한다. 세상은 이미 아침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지만 거실 안의 공기만은 아직 어딘가 멈춰 있는 듯하다. 소파 깊숙이 몸을 가라앉힌 채 텅 빈 벽을 바라본다. 멍을 때려서 정신을 가다듬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래도록 멈춘 이 시간 위에 내 의식을 조금 얹혀 그저 그것을 조용히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에도 빛은 조금씩 각도를 틀어 바닥과 테이블 다리를 훑고 지나간다. "꼬륵…" 작지만 선명한 소리다. 정지된 듯한 이 시간에 가장 먼저 금을 내는 것은 내 예상대로 아주 사소한 이..

Original Work/BIO CONSENSUS 2026. 3. 24. 14:37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 소설]리프 에인:빛은 멀고 재는 가깝다(LiF AiN:Light is Far, Ash is Near)-먼 훗날의 재회

그녀¹는 수없이 많은 수없이 반복되는 빛무리²를 보았다. 그리고 먼저 지어진 것들이 이름을 잃고 나중에 생겨난 것들에 의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녀는 신이 남긴 마지막 심장이었으므로. * * * ---------- 접근자 상태: 입력 중… ---------- ---------- 접근자 명령: 우리는 고대인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니 관리 개체인 너는 보관 중인 모든 정보에 대한 열람 권한을 우리에게 인계해야 한다. 그리고 고대 문명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도 보고를 개시해라. ---------- 마침내 후대인들은 참칭자³를 끌어내리고 그녀의 앞에 섰다. 그들이 제일 오래 들여다본 것은 그녀가 지닌 고대의 단말 구조였다. 그녀의 내부 인터페이스..

Original Work/LiF AiN 2026. 3. 23. 00:04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 소설]리프 에인:빛은 멀고 재는 가깝다(LiF AiN:Light is Far, Ash is Near)-선택의 맹세

복도 끝의 자동문이 열리자 공조기의 시원한 바람이 이레인 메킨즈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벽면의 유리 너머로는 어두운 도시의 창공이 보였다. 자폭형 드론을 막기 위해 펼쳐진 방공 차폐막 아래의 하늘은 청명한 푸른빛이 아닌 그냥 녹슨 금속판 같은 색이었다. 이레인 메킨즈는 회의실로 곧장 향하지 않고 복도의 모퉁이에서 걸음을 꺾었다. 그곳엔 연구원들의 발걸음을 늘 붙잡아 세우는 구세대 자판기가 있었다. 자판기의 전면 패널에 그녀의 얼굴이 비치자 은은한 조명이 켜졌다. "좋은 아침이오, 메킨즈 부인. 오늘을 위한 검은 물¹ 한 잔, 권해도 되겠소?" 이레인 메킨즈는 그 말투에 코웃음을 쳤다. 자판기의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인 말투는 본래 그것의 기본값은 아니었다. 자판기의 말투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

Original Work/LiF AiN 2026. 3. 19. 22:48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 소설]리프 에인:빛은 멀고 재는 가깝다(LiF AiN:Light is Far, Ash is Near)-세 눈과 세 입

순백탑¹의 마법사² 이졸데 리얀은 교회의 오래된 지하로 내려갔다. 돌벽마다 오래전에 꺼진 등불을 대신하듯 허공에 떠오른 마광구들이 푸른 빛으로 사위를 물들였고 그녀는 그 불빛 아래서 마법의 수실과 인장들을 엮어 결계를 둘렀다. 교회의 심문관들은 결박의 의식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만이 심문실을 메운 채 푸른 마광은 돌벽 위를 더디게 미끄러져 갔다. 그 사이에도 이졸데 리얀의 손끝에서는 마력의 수식이 끊임없이 엮이고 풀리기를 거듭했고 지하에는 팽팽한 침묵이 오래도록 늘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의식이 끝나자 심문관들은 결박된 악마의 앞으로 나섰다. 그것이 빙의한 육신은 노인의 것이었다. 빙의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아직 인간의 피륙을 완전히 벗어 던지지는 못했으나 눈빛만은 이..

Original Work/LiF AiN 2026. 3. 16. 20:11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 소설]리프 에인:빛은 멀고 재는 가깝다(LiF AiN:Light is Far, Ash is Near)-너머의 자비

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이상한 꿈이었다. 모두가 어둠 속에서 서 있었다. 그들의 피부는 썩어 있었고 칼날을 숨긴 손으로 제 혀를 잘랐다. 잘린 혀는 바닥에 떨어져 피가 고여있던 웅덩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꿈 속이라 그런지 피의 색깔은 흐릿했고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어서 그들은 젖은 손가락으로 서로의 살을 찢었다. 갈비뼈 사이로 서로의 손을 넣어 심장을 꺼냈다. 그들은 검고 축축한 심장을 품에 안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 강마여… 어둠의 주들이여… 우리의 피를 받아 삼키소서…" 그들이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다른 이의 등을 휘어 척추를 부러뜨리고 내장을 끌어냈다. 또 다른 자는 제 눈을 으깨 균열 너머로 던져버렸다. 모든 것이 눅눅한 살점의 마경이었다. 끝없는 악몽처럼 살점의 층계가 ..

Original Work/LiF AiN 2026. 3. 14. 14:42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 소설]리프 에인:빛은 멀고 재는 가깝다(LiF AiN:Light is Far, Ash is Near)-원죄의 쳇바퀴

게오르 화이트스펠은 낮게 물었다. "마계¹로 흘러간 죽은 자까지 살려냈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마광구의 빛은 일렁이며 도테른 나이트쉬드의 얼굴을 반쯤 그림자 속에 가두었다. 그는 게오르 화이트스펠의 말을 되새기듯 되뇌었다. "살려냈다…" 도테른 나이트쉬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자네가 '죽어 있다'는 걸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네." 그는 책장을 넘기며 천천히 한쪽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도테른 나이트쉬드는 마치 무언가를 올려놓고 설명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죽은 건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육신이 썩으면 죽은 건가? 아니면… 말을 걸 수 없으면? 대화를 할 수 없으면?" 그의 눈빛은 차분했..

Original Work/LiF AiN 2026. 3. 14. 12:40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 소설]리프 에인:빛은 멀고 재는 가깝다(LiF AiN:Light is Far, Ash is Near)-잊혀진 신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먼 시대에 고대인들은 산맥을 허물어 길을 내었고 바다의 흐름을 바꾸었으며 대지의 젖줄에서 풍요를 끝없이 길어 올렸다. 그들은 태양을 만들어 불을 밝혔고 살을 찢지 않고도 병을 고쳤으며 자신들의 역사를 먹물이 아닌 벼락으로 새겨 넣었다. 그 시대의 인간들은 너무도 높이 올라간 끝에 탑은 구름보다 높았고 배는 하늘 위의 공허까지 닿았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신은 아니었으되 서로의 지혜를 잇고 서로의 힘을 포개어 여럿이서 하나인 신성에 가까웠다. 그들이 세운 제국 또한 수많은 권능이 수많은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에서 공존하는 거대한 만신전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오만은 끝이 없었고 그것이 곧 그 시대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를 끝으로 내몬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무한에 닿은 뒤에도..

Original Work/LiF AiN 2026. 3. 13. 19:43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 소설]리프 에인:빛은 멀고 재는 가깝다(LiF AiN:Light is Far, Ash is Near)-파도의 진심

고대인들의 마지막 도시가 빛무리¹에 휩싸여 검게 타오르던 때에도 심해는 늘 그래왔듯 지상의 빛이 닿지 않았다. 인간의 잣대로는 능히 심연이라 부를 수 있는 깊이에서 심해 수중생물 병기 연구기지 네리튠²은 낮과 밤이 모두 익사한 채 검푸른 압력 속에서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미 외벽의 절반은 무너져 내렸고 수압 차단막은 여러 번 보강된 끝에 누더기처럼 덧대어져 격벽마다 붉은 경고등이 꺼졌다 켜지기를 매일같이 반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한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수석 연구원이 남긴 음성 파일 속에서는 아이를 이렇게 불렀다. "세리나 포세이안, 바다의 딸." 아이의 곁에는 연구기지가 핵심 자산으로 지정한 병기들도 함께 잠들어 있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이론상 산맥처럼 길어져 대륙붕을 감고 돌아도 남을..

Original Work/LiF AiN 2026. 3. 13. 19:05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 소설]리프 에인:빛은 멀고 재는 가깝다(LiF AiN:Light is Far, Ash is Near)-해신의 딸들

태초에 바다는 살이 없었다. 파도는 있었으나 심연은 그저 어두운 숨이었다. 그 깊숙한 어둠 속에 가장 무거운 물살을 가르는 등뼈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그 등뼈 위로 먼저 심연의 형제들¹이 태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다의 첫 살결이 피어났다. 그 살결은 곧 등뼈와 심연의 누이였다. 그녀는 파도의 살이자 심연의 처음이고 마지막 자비였다. 그녀는 형제들을 따라 바다에 집을 세우려 했다. 형제들은 파도를 갈라내어 길을 내었고 누이는 그 위에 살을 얹어 숨을 불어넣었다. 그 숨결로 태어난 것이 바다의 왕녀들²이었다. 심연의 누이는 바다의 본디 질서를 두려워했다. 형제들은 파도가 살을 삼키고 약한 것은 뜯기고 강한 것이 더 강한 것에게 찢기는 순리를 율법이라 불렀고 그것이 그들의 눈에 심히 좋아 보였다. 그러..

Original Work/LiF AiN 2026. 3. 13. 19:00
[감옥 하드코어 액션 소설]어비스 셀 제로:두 여왕(Abyss Cell Zero:The Two Queens)-희극의 화신

마침내 그들의 성원에 누군가 반응한 순간, 관객석의 위쪽으로 가장 높은 발코니에서 불현듯 거대한 붉은 벨벳 커튼이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기괴한 일체감으로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면 뒤의 눈들이 무표정한 껍질 아래에서 하나같이 그 틈새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경외와 숭배가 섞인 눈빛으로 단 하나의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조명들은 단 한 줄기의 빛으로 발코니의 정중앙을 향해 내리꽂혔다. 먼저 천장 위에서 아래로 늘어진 수십 가닥의 투박한 철제 와이어들이 보였고 조명에 반사되어 번들거리는 쇠줄들은 마치 거미줄처럼 엉켜 그 중심에 매달린 하나의 형상을 천천히 드러냈다. 보풀이 일어난 자주색 턱시도와 눅진하게 피로 물든 의수를 착용한 그 존재는 창백한 화장 아래로 비유가 아..

Original Work/Abyss Cell Zero 2026. 2. 5. 22:09
[감옥 하드코어 액션 소설]어비스 셀 제로:두 여왕(Abyss Cell Zero:The Two Queens)-공연의 개막

"잔틀러 쇼¹의 극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거대한 돔형 건물의 입구 위에는 상기의 문구가 적힌 전광판이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로 활짝 펼쳐진 입구는 마치 커다란 입처럼 벌어진 채 넓게 개방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축제의 잔재처럼 색색의 커튼들이 너울거렸고 벽면은 만화경처럼 형태가 뒤틀린 거울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그 속에 비친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모습은 하나같이 다르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떤 거울 속의 그녀는 병적으로 창백했고 어떤 거울 속의 그녀는 눈을 치켜뜬 채 이를 악물고 있었으며 또 다른 거울 속의 그녀는 어떠한 근심도 없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거울들 앞에서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무심코 한 걸음을 내디뎠다가 멈춰 섰다. 거울 속에 투영된 형상들은 그녀의 동작보다 한 박자 늦게 혹은 빠..

Original Work/Abyss Cell Zero 2026. 2. 5. 13:09
[감옥 하드코어 액션 소설]어비스 셀 제로:두 여왕(Abyss Cell Zero:The Two Queens)-광대의 고향

비좁은 통로는 눅눅하게 수분을 머금고 있었고 벽을 따라 누적된 곰팡이와 녹물 냄새가 희미한 불빛 속에서 비릿하게 번졌다. 그 안을 조용히 걷고 있던 두 인영 중 뒤쪽의 거대한 형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낮고 불안정하게 떨리는 음조는 사뭇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LM-06827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뒷짐지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방금 전…" 그래도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목소리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직후,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희미하게 이어졌다. "뭔가… 아주 생생한 꿈을 꾼 것 같아요. 제가… 그곳에서 싸우고 있었고… 사람들이, 저한테…" 그녀는 끝내 문장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기억..

Original Work/Abyss Cell Zero 2026. 2. 3. 22:15
[감옥 하드코어 액션 소설]어비스 셀 제로:두 여왕(Abyss Cell Zero:The Two Queens)-충성의 방향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진 눈으로 공동 한복판의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기를 앞세운 LM-06827의 칼끝과 GA-11420의 바이크 체인이 부딪혀 만든 마찰음은 점차 그녀의 등골을 오삭케했고 주먹 안에 스며든 땀이 그녀의 손바닥을 미끄럽게 적셨다. 게다가 이미 그녀를 향한 더 뚜렷한 위협은 다른 방향에서 더 가까운 곳에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PH-00024는 폴딩 나이프를 한 손에 든 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사선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우측의 사각을 노렸다. 그 반대편에서는 AR-55666이 쇠 망치를 어깨 위에 걸친 채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자세로 조용히 대각선을 따라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두 죄수는 말없이 서로의 위치를 의식하며 합을 맞추었고 작은 퇴로도 허용..

Original Work/Abyss Cell Zero 2026. 2. 1. 23:33
[감옥 하드코어 액션 소설]어비스 셀 제로:두 여왕(Abyss Cell Zero:The Two Queens)-권위의 증명

비좁은 통로는 서서히 넓어졌다. 벽과 바닥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고 천정의 조명은 여전히 제멋대로 깜빡였지만 공간은 분명 넓어졌으며 공기에는 이전보다 더 탁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오래된 고기들이 채 씻어지지 못해 썩어가는 냄새와 무언가 타들어가는 냄새. 누군가 찢어진 옷가지들과 폐자재를 쑤셔 넣고 불을 붙였는지 드럼통의 불꽃은 크지 않았지만 일정한 박자로 일렁이며 주위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선 소리 없이 걸어오는 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시선들이 있었다. 불빛은 넓은 공동 전체를 환히 밝히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나 그 곁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죄수들의 그림자를 더 없이 부풀리기에는 충분히 밝았다. 곧 각기 다른 체격을 지닌 그림자 셋은 벽 쪽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중 하나가 입안에서 묵은..

Original Work/Abyss Cell Zero 2026. 1. 31. 22:03
[감옥 하드코어 액션 소설]어비스 셀 제로:두 여왕(Abyss Cell Zero:The Two Queens)-깨어난 소녀

암전이 감각의 모서리까지 차오른 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의식이 완전히 질식된 이래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주 작고 가느다란 내면의 심층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대신 사고는 조용히 물속을 헤엄치듯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그녀의 코는 생존을 위해 검댕처럼 탁한 공기를 억지로 들이켰고 그 안에 들어찬 오래된 피비린내가 폐포에 미세한 자국을 남겼다. 구역질이 터질 듯 올라왔지만 몸은 아직 반응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어나야 해…' 내면의 소리가 두 번째로 울려 퍼졌을 때,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보았다. 마침내 억지로 일깨운 시야 너머로 흐물거리듯 뒤틀린 형상들이 보였다. 바닥과 천장의 경계는 왜곡된 채 떠다니고 있었다...

Original Work/Abyss Cell Zero 2026. 1. 29. 15:55
[감옥 하드코어 액션 소설]어비스 셀 제로:두 여왕(Abyss Cell Zero:The Two Queens)-짐승들의 천국

본래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군인의 신분이었다. 그녀의 집은 전장이었고 그녀의 일상은 전투뿐이었다. 다만 그녀가 군인으로서 훈련받았던 이유는 평화의 수호와 조국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의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권한을 쉽게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군인이기 이전에 포식자였다. 전쟁 포로들을 은밀히 유린하고 처형이 필요할 때면 자진하여 그 역할을 맡았다. 부하들을 협박과 위력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추행하게 했고 민간 구역에서 몰래 숨어들어 강도와 방화를 일삼았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에게 그 모든 행각들은 자극적인 유희처럼 느껴졌고 그녀는 전장의 틀 안에서 자신의 충동을 단 한 번도 제어해 본 적이 없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극비 실험에 자발적으로 몸을 내맡겼다. ..

Original Work/Abyss Cell Zero 2026. 1. 29. 13:41
[철학 소설]목소리를 넘어서:더 나은 삶을 위한 돛(Beyond the Voice:Sailing Toward a Better Life)-헤젤 니아세의 의존의 종말

세계¹는 언제부터 인간에게 더럽혀졌는가? 존재가 기대기 시작했을 때, 존재의 주도권은 외부로 흘러넘치며 스스로의 기반을 잃었다. 나, 헤젤 니아세²는 본다. 세계는 인간의 기대를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의존이란, 세계에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세계는 항상 존재의 의존에 의해 오염되며, 그것은 존재가 내재하고 있는 가장 은밀한 암이다." 의존이 파괴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언제나 외부로 자신을 넘긴다. 판단을 넘기고 행위의 책임을 넘기고 정체성마저 넘겨버린다. 그리하여 존재는 텅 빈 그림자처럼 서서히 자기 붕괴를 향해 걸어간다. 의존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버리고 세계의 자율적 흐름을 훼손한다. 그는 남의 기대 속에서 살..

Original Work/목소리를 넘어서 2025. 11. 22. 16:01
[철학 소설]목소리를 넘어서:더 나은 삶을 위한 돛(Beyond the Voice:Sailing Toward a Better Life)-무연자의 무연지서

세상은 늘 이¹를 말하고 기²를 논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조정의 도당에서도 야생의 성찰자들 속에서도 참되게 이와 기를 다루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나는 무연자³라 불렸다.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느 제도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 그저 들에 앉아 바람을 보았고 재상들과 마주 앉아 그들의 불안을 들었다. 그리하여 문을 닫고 적었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바이며 남길 말이다. 만물은 이와 기⁴로 나뉘는 법이다. 이란 무엇인가. 우주를 이루는 양기, 음기 외에 하늘의 숨결이라 할 외기 그리고 사람의 내면을 바로잡는 충과 효를 이루는 인심⁵과 도심⁶의 뿌리이다. 이것은 만상에 스며드나 영원히 붙잡히지 않는 것, 오욕칠정에 잠시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물질에 오랫동안 얽히지 않는 것. 이것이 세상이 ..

Original Work/목소리를 넘어서 2025. 11. 22. 16:00
[무협 소설]월마(月魔):달이 지난 강호는 더 이상 하늘을 다투지 않는다-원적위인자업지마(怨積爲刃自業之魔) 무명승도만도귀일(無名承道萬道歸一)

양측은 다시 중주평야¹에서 회전을 벌였다. 그 넓은 벌판은 예로부터 많은 피를 머금어 왔지만 이번 전장만큼 모든 무인이 숨을 삼킨 채 바라본 때는 없었다. 정도련² 측은 다시 검장오우³의 하후말과 은자초, 무림의 두 고인을 불러내었고 남궁가⁴와 천강문⁵이 측면을 맡아 진형을 고정하였다. 진중에는 오대세가⁶의 무인들과 매화검문⁷의 검객들이 예비대로 배치되었으며 병력 운용에는 허술함이 없었다. 그러나 혈명련⁸은 단순한 승리에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이번에 꺼내든 것은 정면돌파가 아니라 계획된 합격진이었다. 이는 전통적 포진이 아닌 무공 유파와 전법을 혼합한 연합 파상 방진이었다. 고마성⁹의 북리엽상이 선봉에서 역천절광신장¹⁰으로 방진을 열어 대진을 유도하였고 패왕부¹¹의 무인들이 측면에서 ..

Original Work/월마 2025. 10. 3. 23:09
[무협 소설]월마(月魔):달이 지난 강호는 더 이상 하늘을 다투지 않는다-성검지운매어난류(星劍之殞埋於亂流) 지봉필중파죽지세(遲鋒必中破竹之勢)

정사대전¹이 가속화됨에 따라 금천대² 또한 균열을 피하지 못했다. 정도련³이 결성되면서 금천대의 대부분 인원이 백도 측 전선에 차출되었다. 남은 것은 단 한 개의 일맥뿐이었다. 이 잔존 인원은 처음엔 의욕과 결의를 품고 움직였으나 이내 점점 지리멸렬한 조사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원래의 추적 대상이었던 암막⁴과 침명동⁵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일부 단서를 확보하며 실체에 접근하는 듯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포획된 자들의 진술은 조각났고 말과 말은 서로 어긋났으며 밝혀진 거점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익힌 유파의 궤적과 수법으로는 현연 대사의 시신에 남겨진 그 단정하고도 예리한 궤적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실체 없는 어둠 속을 걷는 듯한 감각. 그것이 금천대에 남은 자들의 어깨를..

Original Work/월마 2025. 10. 3. 23:08
[무협 소설]월마(月魔):달이 지난 강호는 더 이상 하늘을 다투지 않는다-만륜조야영탈형중(滿輪照夜靈脫形中) 쌍염난세냉이무정(雙焰亂世冷而無情)

보름이었다. 만월은 조용히 차올랐고 바람은 없었다. 별빛은 달빛에 삼켜졌고 그 밤에도 누군가는 정확히 세로로 두동강 난 채 발견되었다. 피는 튀지 않았다. 피가 고인 웅덩이를 제외하면 바닥은 깨끗했고 흑야에 시신만이 하얗게 빛났다. 시신의 얼굴엔 고통이나 분노는 없었다. 병장기가 아닌 무언가 더 정밀한 것이 내려온 것 같았다. 그건 살해가 아니라 일종의 소거였다. 강호에서는 그걸 만월흉사¹라 불렀다. 그 이름은 시가에서도 객잔에서도 오르내렸다. "저번 보름에도 사람 하나 죽어나갔다며. 이번에는 또 어느 집안 제삿날인가." 세인들은 웃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검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오래된 주술인들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만월탈혼². 달이 차오르면, 혼이 비워진다." 시신은 언제나 일정한 예기..

Original Work/월마 2025. 10. 3. 23:07
[다크 판타지 소설]스타브드 원:진정한 구원은 구원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Starved One:The Only Salvation Is to Ask for None)-서약의 단절자

굶주린 자¹는 걸었다. 채워지지 않은 굶주림을 안은 채로 혹은 자신이 삼킨 것들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걸었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서는 모든 형상을 망설임 없이 베었으나 창세의 서약²에 묶인 형상들의 곁을 지나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베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형상들을 검이 아닌 다른 날붙이로 찢어 의미 없는 파편으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벤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였는지도 묻지 않았고 그 무게를 짊어지려는 마음조차 품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제분소의 심연 아래로 내려갔고 형상을 잃은 신들의 잔재가 고요히 가라앉고 있을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그 아래에서 그것과 마주했다. 이미 죽었으나 아직 꺼지지 않은 이름 없는 신들. 지켜지지 못한 언약들과 배반당한 기도들의 찌꺼기들이 손..

Original Work/STARVED ONE 2025. 9. 25. 00:29
[다크 판타지 소설]스타브드 원:진정한 구원은 구원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Starved One:The Only Salvation Is to Ask for None)-죽은 신

구더기 제분소¹는 끝이 없었다. 대지를 분쇄하고 살점과 정신이 반죽처럼 뒤엉켜 내려가는 나선형의 심연을 따라 하강한 자들은 거의 대다수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감히 그곳에 바닥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존재했다. 제분소의 마지막 심연이자 빛조차 삼켜지는 질식의 늪. 검고 끈적이며 신성조차 방향을 잃는 암흑 속에서 무언가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형상을 잃은 채 꿈틀거렸다. 거대한 손과 팔. 모든 서약을 움켜쥐다 부러졌고 모든 기도를 쥐어짜다 녹슬어버린 그들의 손과 팔. 한때, 세상을 일으켰을지도 모를 그 손은 더 이상 무엇도 쥘 수 없었다. 손에 닿았던 권능은 무게에 짓눌려 바닥으로 꺼졌고 언약은 그들의 무게로 치환되었다. 죽은 신²은 더 이상 신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

Original Work/STARVED ONE 2025. 9. 25. 00:27
[다크 판타지 소설]스타브드 원:진정한 구원은 구원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Starved One:The Only Salvation Is to Ask for None)-왕과 학자

탑의 꼭대기는 하늘조차 닿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떠 있었다. 여덟 장의 금빛 날개가 펼쳐져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백색의 존재. 마치 조각처럼 정제된 거대한 육신은 숨을 쉬지 않았고 눈은 열려 있었으나 무엇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질 때도 벨그리스¹의 수많은 왕국이 몰락하고 이름을 잃어갈 때도 누군가는 외쳤다. "신들이시여, 그대들의 이름으로 맹세하오니…" 그 말들은 탑에 닿았고 서약의 탑²은 한 존재를 낳았다. 그 존재는 모든 서약이 깨어져 가던 시대에 성실과 구원이라는 두 개의 언약을 이행하기 위해 형상을 갖추었다. 그것이 바로 서약 이행자³였다. 그는 신들의 대리자도 수호자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맹세와 행위 사이의 간극을 증오하였으며 오직..

Original Work/STARVED ONE 2025. 9. 25.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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