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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그리스¹는 처음부터 잿더미의 땅은 아니었다.
오래전, 세상은 수많은 왕국들로 나뉘어 있었고 각자는 저마다의 신과 맹세를 따랐다.
하늘은 맑았고 땅은 비옥했으며 도시들은 별처럼 타올랐고 대지에는 생명이 흘러넘쳤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서약을 신성으로 여겼고 그 이행은 곧 권위였다.
왕들은 맹세를 왕관에 새겼고 기사들은 그 신념을 칼에 새겼다.
그러나 벨그리스는 서약에 과도하게 의존했다.
사람들은 구원의 서약을 신들에게 강제하기 위해 기도했고 또 기도하여 그 기도는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강제와 왜곡으로 변질됐다.
구더기 제분소²는 처음엔 실존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된 사념의 폐허, 무너진 신념과 잠들거나 버려진 의식의 쓰레기 더미였다.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질문하기 시작했을 때 그 제분소가 대지 아래에 생겨났다.
처음엔 꿈속에만 있었지만 곧 실체를 갖추어 피와 살을 갈아 마력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존재는 흐물거렸고 본질은 점차 바닥으로 끌려갔다.
잿빛 성채의 바다³는 세상의 종말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낮은 짧아졌고 별은 타락했으며 이성으로 세계가 이해되지 않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하나둘 도시를 버리고 인파가 멈춘 자리마다 석조의 외벽을 쌓기 시작했다.
예언이나 계시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공포 때문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채는 서로 닿지 않았다.
각 성채는 자신만의 기도와 언약을 품었고 그 안의 사람들은 바깥 세계를 기억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길은 끊어졌고 도시들은 말없이 허물어졌으며 왕들은 죽기 전에 이미 잊혀졌다.
서약의 탑⁴이 생겨난 것은 마지막이었다.
누가 그것을 세웠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빛조차 생기를 품지 않는 그 탑을 향해 걷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구원을 내려주는 것이 아닌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이 스스로 올라서 하늘에 닿기를 강요하는 의지처럼 보였고 누군가가 지키지 못한 서약들이 모여 만들어진 죄의 첨탑처럼 보였다.
이후로 벨그리스의 사람들은 한때, 번성했던 대지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흔적은 가끔 꿈에서 스치듯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오랜 갈망 끝에 왜곡된 환상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벨그리스는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단지 증오와 인내로 버티는 자들만이 존재하는 고요한 무덤이 되었고 하늘과 땅은 잿빛으로 물들어 바람도 시간도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¹ : Velgrith
² : The Maggot Mill
³ : The Sea of Ash Castle
⁴ : The Tower of O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