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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소설]월마(月魔):달이 지난 강호는 더 이상 하늘을 다투지 않는다-만륜조야영탈형중(滿輪照夜靈脫形中) 쌍염난세냉이무정(雙焰亂世冷而無情)
jgkjustcreat 2025. 10. 3. 23:07
보름이었다.
만월은 조용히 차올랐고 바람은 없었다.
별빛은 달빛에 삼켜졌고 그 밤에도 누군가는 정확히 세로로 두동강 난 채 발견되었다.
피는 튀지 않았다.
피가 고인 웅덩이를 제외하면 바닥은 깨끗했고 흑야에 시신만이 하얗게 빛났다.
시신의 얼굴엔 고통이나 분노는 없었다.
병장기가 아닌 무언가 더 정밀한 것이 내려온 것 같았다.
그건 살해가 아니라 일종의 소거였다.
강호에서는 그걸 만월흉사¹라 불렀다.
그 이름은 시가에서도 객잔에서도 오르내렸다.
"저번 보름에도 사람 하나 죽어나갔다며. 이번에는 또 어느 집안 제삿날인가."
세인들은 웃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검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오래된 주술인들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만월탈혼². 달이 차오르면, 혼이 비워진다."
시신은 언제나 일정한 예기에 의해 정확히 중심에서 나뉘었다.
시신에는 기혈이 흐르지 않았고 일말의 혼백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이한 것은 흉수는 매번 단 한 번의 베기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은 항상 일도에 찾아왔다.
이런 흉사에 내막을 아는 자들은 더러 있었다.
아주 오래전, 흉사를 직접 목도하고 살아남은 어떤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날… 달빛은 너무 밝았소. 그림자도 숨을 곳을 잃은 그날…"
사내는 백주³를 마른 목에 털어내고 떨리는 손으로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관평⁴의 제일 고수, 적풍귀⁵ 강홍립…"
그는 천천히 잔을 들었다.
"그는 어떤 저항도 못하고, 그자의 일도에 두 동강이 났소."
잔을 든 손은 고요했으나 눈은 계속 흔들렸다.
"그건 마치… 달빛이 내려와, 그를 벤 것 같았소."
그는 그렇게 털어놓은 이후로 다시는 흉사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묻든 어떻게 물어도 그는 한사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 때문이 아니라 말로 옮기면 안 되는 종류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적어도 그 사내의 두려움은 침묵보다 깊었고 그날에 그가 목도한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무언가 순리에서 어긋난 균열이었다.
그래서 사내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도리였다.
그의 침묵이 흐르고 무림에는 여러 번의 보름이 돌아왔다.
아직까지도 그런 비사에 관심을 두는 것은 한량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강호에는 풀어야 할 은원이 있었고 지켜야 할 문파가 있었고 갈고닦아야 할 무공이 있었다.
강호는 바빴다.
문파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싸웠고 누군가는 은원을 갚았고 누군가는 고절한 무공을 탐했다.
모두가 바빴다.
여전히 누군가 보름마다 죽어갔지만 세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강호는 본래 무정했다.
하루에도 수십이 죽었다.
검 한 자루, 오해 한 마디, 경공 한 발의 차이로 목숨이 스러져갔다.
그것은 누구도 이상히 여기지 않았고 누구도 캐묻지 않았다.
무공이란 본래 그런 것이었고 강호 또한 그런 곳이었다.
만월흉사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일은 그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어떤 날은 무림 방파들의 대립에 피가 흐르고 어떤 날은 원수를 향해 겨눈 일도가 성공해 피가 흘렀다.
그런 일들에 비교하면 만월마다 한두 명쯤 죽어나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사소한 것이었다.
그것은 태양빛에 반딧불 하나를 들이미는 것만큼이나 사소했다.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고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아무도 추적하지 않았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강호는 계속 만월을 넘겼다.
* * *
혈자문⁶의 장문 조옥림의 회갑연은 강호의 오래된 그림자들을 불러모으는 자리였다.
그녀는 표독한 검공인 혈리만화검⁷으로 악명을 떨친 여인이었고 수많은 살생을 넘어 여전히 기혈은 끊기지 않았으며 단정한 의복 위로는 노쇠함 대신 내공이 비쳤다.
흑도의 중견 세 가문, 열화검가⁸, 모용가⁹, 악가¹⁰는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지금 그들은 한상에 앉아 술잔을 돌리고 있었고 말은 없었지만 시선은 짧게 부딪히며 눈빛은 오래된 결을 읽고 있었다.
위지평의 불꽃같은 열화는 아직도 식지 않았고 모용왕의 그림자도 아직 한혈을 품고 있었으며 악홍벽의 산을 무너뜨릴 만큼 무쌍한 강권은 여전히 무게감 있게 탁자에 얹어져 있었다.
조옥림이 그들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강호는 혼탁하되, 꽃은 피는 법이지. 피는 장소가 지옥일지라도, 향은 남는다네."
그녀는 술잔을 기울였고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이 노신이 나이 들어 깨달으니, 강호에 오래 남는 것은 무공이 아니라, 마음을 지키는 도리더군. 그대들은 본녀가 한창 강호에 피를 흩뿌릴 때부터 영민하다고 소문났던 후학들이니,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믿네."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오래된 살기의 잔향처럼.
한 자루 검에 남은 진의처럼.
그렇기에 말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들은 함께 앉아 흑도의 내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삼화연회¹¹가 만들어졌다.
열화검가의 열화검¹², 모용가의 한혈검¹³, 악가의 천압강권¹⁴.
그 셋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기질과 무공을 삼화라 불렀고 그 맥이 하나의 강처럼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연회라 이름 붙였다.
그들은 이를 말로만 하지 않았다.
붓을 써서 글을 돌렸고 세간에 공표했다.
그들의 모임은 강호의 음모가 구상되는 곳이 아니라 고수들이 차 한 잔 기울이는 정정당당한 호교회였다.
세인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흑도삼가¹⁵는 천하를 질타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흑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피가 흐르던 자리에서 대화가 오갔다.
협의가 생겼고 신의가 지켜지기 시작했다.
삼화연회는 비록 흑도의 이름을 달고 있었으나 그 걸음은 곧 백도의 중추라 불리는 오대세가¹⁶와도 교차하게 되었다.
남궁가¹⁷의 검은 삼화 앞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검은 곧았고 검을 쥔 세가의 검객들은 명예를 알았다.
당가¹⁸의 독은 냉혹했으나 그 독은 결코 삼화의 술잔에 섞이지 않았다.
경계를 잃은 것은 그들의 독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었다.
서문가¹⁹, 단리가²⁰, 제갈가²¹는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고 그 다리는 흔들림 없이 중심을 지켰다.
그들 모두는 서로를 사마로 규정하지 않았다.
길은 다르나 검을 쥔 손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세를 새기거나 서로의 피를 나눠 마신 것은 아니지만 단지 흑백이 교류하는 기묘한 정세 속에서 간간이 만나 차 한 잔, 술 한 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교류는 누군가의 눈에는 너무도 위험한 균열로 비쳤다.
강호의 음지에 드리운 오래된 그림자는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천력교²²의 부교주 왕태위는 보름마다 어김없이 이어지는 만월흉사보다도 은근히 고요히 강호를 덮어오는 한 줄기의 기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말 없이 다가오는 흑도의 변화, 소란 없는 연합.
삼화연회.
열화검가, 모용가, 악가.
그 셋은 분명 흑도의 문파였다.
한때는 누구보다도 거칠었고 독자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백도의 오대세가와 함께 술을 기울였고 차를 나누었고 무공에 대해 이야기하며 수양의 깊이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눈에는 흑도의 저력을 서서히 순화시키려는 백도의 한 수로 보였다.
눈에 보이는 목줄은 없었지만 의도는 분명했다.
왕태위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많은 것들을 지나쳐왔다.
한때, 천력교는 날카로웠다.
천력교는 오랜 세월 동안 흑도의 종맥을 틀어쥐고 있었다.
수라마검²³과 혈령인²⁴, 사극태양수²⁵ 등의 파괴적 무공들이 교를 받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칠성처럼 떠 있는 전대 교주 담천기가 있었다.
담천기는 교외로 세력을 팽창하려 했다.
강호를 향해 천력의 기를 세웠고 오직 강호독패²⁶를 위해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된 병에 의해 눈을 감았다.
교주 위가 비었고 안에서는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권한은 나뉘었고 충성은 흐려졌다.
교주가 없으니 교는 위신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흑도에서 천력교의 이름은 점점 낮아졌고 세인들은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교는 강호의 중심으로 뻗어나가려 했지만 멈춰버렸고 왕태위는 기회를 기다렸으나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날개는 꺾여 하늘은 점차 멀어져만 갔다.
요즘 강호에 불어오는 은근한 기류도 왕태위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던 중 왕태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교세의 빈자리를 메꾸며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던 마도의 원로 세력 고마성²⁷이었다.
고마성에는 강호가 주목하는 두 명의 신흥 고수가 있었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가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그 이름들을 들었다.
그들을 직접 본 이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세인들의 항설로 남아 있었고 그 안에서 그들은 충분히 강했다.
격중 당한 이의 혈맥을 찢는 역천절광신장²⁷의 고수, 북리엽상.
창천을 거슬러 모든 것을 멸하는 건곤멸절검²⁸의 마검객, 최혼.
어떤 이는 그들이 예전부터 강호에서 활약하던 고인들이라 말했고 또 다른 이는 아예 세외의 사문이나 밀궁에서 발호한 괴이들이라 수군거렸다.
왕태위는 가담항설을 잘 믿지 않았다.
그는 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예감이라는 것의 무게를 잘 아는 자이기도 했다.
근래 크게 맹위를 떨치고 있는 고마성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교의 발이 묶인 지금 시점에서 너무도 시의적절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곧 왕태위는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본노는 조종할 교가 있고, 그대들은 쓸 무력이 있다. 세상이 피로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는 속인들이 무슨 도리를 알겠는가."
별다른 허례는 필요 없었다.
그들은 이미 말이 필요 없는 사이였다.
그들은 강호의 평화를 도모하기보다 혼란 속에서 기회를 읽어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겐 도의도 명분도 중요치 않았다.
오직 강호의 패권만이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무림의 지도 한 장.
세 사람은 말없이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았고 어느새 손짓 하나, 눈빛 하나로 경계가 나뉘며 영역이 가늠되었다.
그것은 소리 없는 분할이었고 형상 없는 협의였다.
삼화연회가 백도와의 교류를 시작한 이래, 흑도의 일맥도 서서히 유연하게 해체되고 있었다.
술잔이 오가고 무공이 교류되며 예전 같으면 피가 흘렀어야 할 자리에 담소가 흘렀다.
누군가는 이를 강호의 신풍이라 평했고 누군가는 태평의 흐름이라 여겼으나 적어도 이들의 눈에는 그것이 곧 흑도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지독한 독수였다.
그들은 그 흐름을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뜻이 같은 이들을 마주한 자리에서 왕태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 역시 말없이 화답했다.
맹약은 없었다.
글로 남긴 것도 없었고 피로 새긴 서약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그들 사이에 오간 암묵은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강호를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강호에서는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만월흉사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시신을 무수히 남겼다.
* * *
왕태위와의 밀담이 오간 뒤, 고마성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극히 일부의 고수를 은밀히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대일로 이름을 널리 떨친 자들이었으며 그 이름만으로도 문파 하나쯤은 술렁이게 할만한 인물들이었다.
천왕도²⁹의 고수, 장무군.
추혼은사검³⁰의 고수, 이섬교.
그들은 천력교 내부에 조용히 침투하여 왕태위를 도왔다.
왕태위는 예옥수³¹의 고수이자 집형전주 백매령, 수라마검의 고수이자 총외당주 손도영, 호법원³⁴과 함께 강단 있게 교권을 재정비했다.
갓난 아기에 불과한 소교주를 위시하는 거역의 무리들은 검집을 닫고 뒷걸음질 치는가 싶더니 극비리에 조직한 무력 집단인 흑혈당³⁵과 혈신당³⁶을 이끌고 총외당주의 수급을 베었다.
그날 밤, 천력교 외당의 전각들은 일제히 불에 타올랐다.
이 사건은 교중은 물론 흑도를 뒤흔들 만큼의 큰 소란이었다.
그렇기에 소교주의 무리들은 이것을 부교주의 패배라 여겼고 곧 호법원의 대진을 마비시키고 왕태위의 수급을 벨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왕태위는 이 혼란 속에서 오히려 명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이제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를 막을 명분도 그를 규율할 도의도 사라졌다.
그는 곧장 움직였다.
총외당주의 죽음과 외당들의 전소를 발판 삼아 그간 은밀히 쌓아온 고마성과의 동맹을 드러냈고 그것을 강호 앞에 천명하였다.
"맹약은 피로 맺고, 삶과 죽음을 함께 하리라! 오직, 흑도천하를 위해!"
왕태위는 외당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혼란을 연합의 명분으로 전화시켰다.
검은 아직 식지 않았고 불은 채 꺼지지 않았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왕태위는 곧장 혈명련³⁷의 첫 회합을 소집하였고 거기서 연합은 고마성을 종주로 삼는 데 이견 없이 만장일치하였다.
겉으론 고마성이 연합의 기치를 맡았으나 실상 그것은 왕태위가 준비한 수순이었다.
그는 종주의 자리를 양보하는 대가로 연합 내부의 법도 수립과 비선 조율을 맡겠다는 명분을 세웠고 이로써 수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 결정을 두고 교내에서는 수군거림이 없지 않았다.
어떤 이는 이를 교에 대한 배반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외문에 의탁한 망동이라 말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감히 그 결단을 막지 못했다.
손도영의 죽음은 명분이 되었고 흑혈당과 혈신당의 승리는 오히려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왕태위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반쯤 굽혀 고마성을 세웠고 그 대신 연합의 숨결과 맥을 쥐었다.
그것은 분명한 도광양회의 수였다.
고마성은 연일 세를 넓혀갔다.
산중에는 그들의 깃발이 나부꼈고 협곡마다 새 진영이 세워졌다.
이름 없는 흑도의 무리들이 속속 그 아래로 모여들었으며 강호의 고인들조차 그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왕태위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혈명련의 기세를 틀어쥐고 교내의 이견을 하나하나 걷어냈다.
이름뿐이던 교주의 권위를 걷어내고 전대 교주의 잔재를 천력교의 깊숙한 내부에서 완전히 도려냈다.
그리하여 교권은 다시 하나가 되었고 그 중심엔 이제 오롯이 왕태위 한 사람만이 서 있었다.
그리고 혈명련의 기세에 감화되어 흑도의 깊은 뿌리를 지닌 옛 세력이 응답하였다.
패왕부³⁸.
한때, 흑도를 반으로 갈랐던 그 패도의 주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패왕도³⁹의 전승자, 진군선.
그와 함께한 패도염공참수⁴⁰의 고수, 양진공.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타난 흑도의 맹자⁶⁶들.
패도무쌍했던 흑도의 옛 기억을 간직한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의 무공엔 시간의 먼지 대신 불꽃이 되살아나 있었다.
패왕부의 합류는 단순한 세력 결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흑도가 강호에 보내는 하나의 선언이었다.
"이제, 흑도는 하나다. 강호의 하늘은 새로이 갈라질 것이며, 천하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이제 명확해질 것이다."
그 목소리는 회합을 거치지 않았고 강호의 중재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의도는 누구보다도 명백했다.
혈명련은 첫 발검을 준비하였다.
첫 번째 목표는 삼화연회의 와해.
백도와 교류하며 강호의 질서를 새롭게 다지려는 이들의 유대를 뿌리째 자르겠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는 흑도 내 잔존 세력의 규합.
그리하여 진정한 하나의 흑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강호엔 바람이 달라졌다.
마치 오래 잠들었던 무림의 음영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듯 강호에 몸을 담은 모든 이들은 조심히 자신의 병장기를 머리맡에 두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세 달 전, 유난히 달빛이 선명히 내려앉던 밤이었다.
봉림사⁴¹의 최고수이자 대정법종타수⁴²의 장인으로 불리던 현연 대사가 법당 한가운데서 정확히 세로로 두 동강 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도반들은 마지막까지 그 기척을 느꼈다고 말했다.
종소리가 울리기 직전, 법당에는 분명히 현연의 호흡이 있었다.
그러나 정시가 지나도록 종은 울리지 않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것은 소리 없는 공기와 피 웅덩이에 잠긴 육신뿐이었다.
봉림사의 중진들은 이 기이한 죽음을 결코 우연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봉림사는 오랜 우의와 깊은 신의를 지닌 두 문파.
신무방⁴³과 소오문⁴⁴에 극비리에 전서구를 날렸다.
두 문파는 청을 받아들였고 각 문파의 내공 수련 중이던 젊은 고수들을 선별해 금천대⁴⁵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살을 업으로 삼는 자들, 곧 무공으로 인명을 다지는 자들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표적은 두 곳이었다.
온혈쇄맥장⁴⁶, 비응절심수⁴⁷ 등의 무공으로 어둠 속에서 살행 목표의 심맥을 파괴하는 살수 집단, 암막⁷⁵.
음명쌍검⁴⁹, 반명야산수⁵⁰ 등의 무공으로 적막 속에서 영을 흩뜨리며 소리 없이 생사를 관장하는 살수 집단, 침명동⁵¹.
금천대는 밤마다 강호의 그늘을 뒤쫓았다.
그러나 진실을 추적하는 길은 곧 신념의 차이를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금천대는 출범하였으나 세 문파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소오문은 살수 집단에게 공포로 진실을 끌어냈다.
그들의 도검은 질문보다 빠르게 빛났고 적의 입을 열기 위해 배후를 토설하게 하기 위해 일각의 지체도 고려하지 않았다.
신무방은 격식과 절차를 중시했다.
강호의 도란 곧 명분이라 믿었고 협의 없는 검은 후환을 남긴다고 여겼다.
봉림사는 자비를 말했으나 그들의 이상은 고요할 뿐 현실의 벽 앞에서는 조롱이나 침묵만을 이끌어냈다.
그 사이, 흑도의 하늘이 뒤집혔다.
혈명련의 창설이 대대적으로 선포되었다.
강호의 벽마다 검은 서찰이 나부꼈고 술상마다 한 문장이 오르내렸다.
흑도천하.
이 네 글자는 마치 현연 대사의 주검 위에 선명히 찍힌 인장처럼 느껴졌다.
봉림사의 방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만 염주를 굴릴 뿐이었다.
그때부터 신무방의 방주 영호난은 검을 벽에 걸지 않았고 낮술을 따랐다.
그 누구도 직접 말하진 않았으나 모두가 짐작했다.
현연을 벤 흉수가 누구인지.
그것은 더 이상 단독자의 소행이 아니었고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흑도의 그림자였다.
은밀히 떠돌던 흑도의 규합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이제 각 방파의 문전까지 다가왔음을 그들은 뼈저리게 자각하였다.
그날 밤, 영호난은 정파의 동도이자 옛 동문인 승룡부⁵²의 군자엽과 마주 앉았다.
달은 밝았고 술은 맑았다.
잔이 비어갈수록 말은 줄었고 술이 떨어질수록 결의는 차올랐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예기를 숨기는 대신 마음을 날카롭게 벼리기 시작했다.
"백도의 검은 아직 녹슬지 않았네."
그날, 두 사람은 강호 전역에 영웅첩⁵³을 뿌리기로 결의하였다.
내용은 오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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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명련에 맞설 군웅들은 신무방에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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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강호의 맥을 이룬 백도의 거문파들에 봉서가 날아들었다.
남궁가의 가주, 남궁평.
당가의 가주, 당대능.
서문가의 서문성현, 제갈가의 제갈영고, 단리가의 단리목.
이름만으로도 강호의 한 축을 이루는 거인들이 조용히 봉서를 받아들었다.
봉서는 수묵으로 그려졌고 먹은 마르지 않은 듯한 여운을 품고 있었다.
그 글에는 이름도 없고 서명도 없었으며 지시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요청이었고 백도를 위해 검을 꺼낼 자격이 있는 자들만이 받아볼 수 있는 강호의 옛 언약이었다.
그렇게 천하의 물줄기는 조용히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나 그 모든 갈등 및 연합과 결의의 한가운데 진정한 흉수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직 만월이 피지 않은 달빛 아래서 침묵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강호의 피는 분명 그를 향해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 * *
달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하던 무렵, 각 방파의 대문 위로 한 통의 봉서가 바람을 타고 내려앉았다.
영웅첩.
묵향 짙은 그 한 장의 봉서가 백도 전체를 흔들어 깨웠다.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소오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금천대에 인물을 투입하여 흑도의 암류를 추적하고 있었고 혈명련의 결성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전쟁의 서막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검은 이미 충분히 벼려져 있었고 이제는 검집을 닫아둘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 이어 매화검문⁵⁴, 천검회⁵⁵ 그리고 백도의 중심을 이루는 오대세가.
천강문⁵⁶, 현의문⁵⁷, 백양파⁵⁸, 발주예검부⁵⁹ 등 이름만으로 강호를 울리던 문파들이 각기 장문인 혹은 원로 고수를 직접 출행시켰다.
심지어 그간 중립을 지켜온 걸방⁶⁰, 팽가⁶¹, 공손가⁶² 또한 자신들의 뜻을 밝히고 정식으로 출병을 천명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백도의 중추 인물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천휘연섬검⁶³의 고수이자 신무방의 방주, 영호난.
용성만천도⁶⁴의 고수이자 승룡부의 부주, 군자엽.
무아반야퇴⁶⁵의 고수이자 봉림사의 방장, 만공.
각기 창궁무애검⁶⁶, 구지절명독⁶⁷, 서풍현필⁶⁸, 우면검⁶⁹, 유운수⁷⁰의 가문 절학을 자랑하는 오대세가 가주들.
매화삼십검⁷¹의 고수이자 매화검문의 장로, 옥감서.
복마검⁷²의 고수이자 소오문의 장문, 주춘의.
양의봉천검⁷³의 고수이자 천검회의 회주, 냉소희.
예한십삼검⁷⁴의 고수이자 발주예검부의 부주, 임벽.
천강무을도⁷⁵의 고수이자 천강문의 장문, 문극천.
의천심수⁷⁶의 고수이자 현의문의 장문, 이의진.
와상검⁷⁷의 고수이자 백양파의 장문, 조현.
대연일백도구퇴⁷⁸의 고수이자 걸방의 방주, 녹애상.
일문호점도⁷⁹의 고수이자 팽가의 가주, 팽학.
단악신수⁸⁰의 고수이자 공손가의 가주, 공손걸.
역산신권⁸¹의 고수이자 황보가⁸²의 가주, 황보칠.
홍주권⁸³의 고수이자 해남칠채동⁸⁴의 장문, 서일표.
그 외에 이름만 들어도 걸출한 백도의 고수들이 한동안 외부와의 출입을 막아왔던 신무방의 청현대협당⁸⁵으로 모두 모였다.
그날 새벽, 전당의 등불이 모두 꺼지고 해 뜨기 전의 짙은 어둠 속에서 검은 하나둘 수평으로 세워졌다.
각 파의 장문인들과 원로 고수들은 병장기를 세워 서로를 향해 예를 취한 뒤, 아래와 같은 결의를 강호에 천명하였다.
"정도련⁸⁶, 이 자리서 공표한다! 정의는 피로 지켜지며, 도리는 검으로 증명된다! 창천 아래, 무림의 정기를 하나의 결의로 지킬 것이다!"
그리하여 흑도가 혈명련으로 하나 되었듯 백도 또한 이제 하나의 이름 아래 검을 들었다.
강호는 더 이상 무심한 풍경이 아니었고 천하의 하늘은 이윽고 두 개의 깃발 아래 거칠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나는 검은 피로 이름을 쓴 혈명련.
흑도의 모든 분파와 방파, 잊힌 마공과 암류의 잔재들까지 하나로 묶어낸 강철 같은 사파의 연합.
다른 하나는 의협과 도의, 선인의 뜻을 계승한 정도련.
백도의 중추이자 천하에 아직 도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정파의 연대였다.
* * *
양 진영은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
누가 먼저 검을 뽑는가에 따라 그 책임과 정당성이 갈릴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은밀히 첩자를 교환하고 의심의 시선을 주고받으며 경계만을 넓혔다.
그러나 갈등은 결국 의혹에서 실체로 음지에서 양지로 번졌다.
먼저 소오문이 검을 빼들었다.
이미 금천대에 투입한 인물들을 통해 흑도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해 온 그들은 혈명련의 창설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사태임을 직감했고 곧 무공으로 응수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매화검문과 천검회가 검을 뽑았고 백도의 오대세가 역시 망설임 없이 호응하였다.
백도는 하나의 물결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궁가의 검객들이 천력교 철기당⁸⁷과 용문협⁸⁸의 깊은 계곡에서 야전을 벌였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그 칠흑 같은 밤에 선명한 검광들이 무수히 부딪혔다.
백봉하⁸⁹에서는 천검회의 태청혜극검⁹⁰과 패왕부의 패도염공참수가 충돌하며 양 진영의 원로 고수가 피를 토하고 물러났다.
무림의 산하는 그 여운으로 한동안 침묵했으나 그들의 병장기 끝에서 뻗어 나간 파장은 각 방파들의 단청을 흔들 만큼 컸다.
그 외에도 당가의 장심독⁹¹은 흑룡방⁹²의 문도들을 녹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천강문의 제자들 일곱이 소리 없이 살해되며 사태는 점점 수습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강호는 더 이상 도의로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과 충돌, 복수와 의협이 맞부딪히는 전장 위에서도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보름이 돌아올 때마다 단 한 사람은 정해진 형태로 예외 없이 죽었다.
그 죽음은 음모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었으며 특정 진영의 이름 아래 이뤄진 살해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
만월이 떠오른 밤이면 누군가 정확히 베여 있었고 피 웅덩이에 잠긴 두 동강 난 육신만을 남겼다.
그 베임은 언제나 흔들림 없는 일도였다.
정도련과 혈명련의 그 누구도 그 일도를 막지 못했고 그자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으며 그의 도신에 몸이 닿은 자는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 어떤 깃발도 따르지 않았으며 오직 침묵 속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강호는 여전히 두 개의 거대한 불길로 맹렬하게 타올라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나는 권력으로 타오르며 명분을 휘두르고 다른 하나는 신념의 이름으로 타오르며 도를 지키고자 했다.
어느 쪽이든 결국 피를 흘렸고 점차 피는 조금씩 더 검고 무정해지고 있었다.
¹ : 滿月凶事
² : 滿月脫魂
³ : 白酒
⁴ : 館枰
⁵ : 赤風鬼
⁶ : 血諮門
⁷ : 血鯉萬花劍
⁸ : 熱火劍家
⁹ : 慕容家
¹⁰ : 岳家
¹¹ : 三花連會
¹² : 熱火劍
¹³ : 寒血劍
¹⁴ : 天壓剛拳
¹⁵ : 黑道三家
¹⁶ : 五大世家
¹⁷ : 南宮家
¹⁸ : 唐家
¹⁹ : 西門家
²⁰ : 段里家
²¹ : 諸葛家
²² : 天力敎
²³ : 修羅魔劍
²⁴ : 血靈印
²⁵ : 死極太陽手
²⁶ : 高魔城
²⁷ : 逆天絶光神掌
²⁸ : 乾坤滅絶劍
²⁹ : 天王刀
³⁰ : 趨魂銀蛇劍
³¹ : 銳玉手
³² : 執刑典主
³³ : 總外堂主
³⁴ : 護法院
³⁵ : 黑血堂
³⁶ : 血臣堂
³⁷ : 血命聯
³⁸ : 覇王府
³⁹ : 覇王刀
⁴⁰ : 覇道焰空斬手
⁴¹ : 鳳林寺
⁴² : 大定法鐘打手
⁴³ : 神武幇
⁴⁴ : 消嗚門
⁴⁵ : 擒賤隊
⁴⁶ : 溫血鎖脈掌
⁴⁷ : 飛鷹竊心手
⁴⁸ : 暗幕
⁴⁹ : 陰鳴雙劍
⁵⁰ : 反明夜散手
⁵¹ : 沈明洞
⁵² : 昇龍府
⁵³ : 英雄牒
⁵⁴ : 梅華劍門
⁵⁵ : 千劍會
⁵⁶ : 天剛門
⁵⁷ : 賢意門
⁵⁸ : 白陽派
⁵⁹ : 渤州銳劍府
⁶⁰ : 乞幇
⁶¹ : 彭家
⁶² : 公孫家
⁶³ : 天輝連閃劍
⁶⁴ : 龍星滿天刀
⁶⁵ : 無我般若腿
⁶⁶ : 創穹無碍劍
⁶⁷ : 九地絶命毒
⁶⁸ : 西風現筆
⁶⁹ : 雨面劍
⁷⁰ : 流雲手
⁷¹ : 梅花三十劍
⁷² : 伏魔劍
⁷³ : 陽意奉天劍
⁷⁴ : 銳寒十三劍
⁷⁵ : 天剛無乙刀
⁷⁶ : 意天心手
⁷⁷ : 渦狀劍
⁷⁸ : 大衍一百屠狗腿
⁷⁹ : 一門壕占刀
⁸⁰ : 斷嶽神手
⁸¹ : 易山神拳
⁸² : 皇甫家
⁸³ : 虹紬拳
⁸⁴ : 海南七彩洞
⁸⁵ : 靑玄大俠堂
⁸⁶ : 正道聯
⁸⁷ : 鐵氣堂
⁸⁸ : 龍門峽
⁸⁹ : 白鳳河
⁹⁰ : 陽意奉天劍
⁹¹ : 薔沁毒
⁹² : 黑龍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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