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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일광이 고요한 물결처럼 거실 안으로 흘러든다.
유리창을 지나온 빛은 서늘할 만큼 또렷하고 그 안에 떠도는 먼지들은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천천히 허공을 부유한다.
세상은 이미 아침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지만 거실 안의 공기만은 아직 어딘가 멈춰 있는 듯하다.
소파 깊숙이 몸을 가라앉힌 채 텅 빈 벽을 바라본다.
멍을 때려서 정신을 가다듬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래도록 멈춘 이 시간 위에 내 의식을 조금 얹혀 그저 그것을 조용히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에도 빛은 조금씩 각도를 틀어 바닥과 테이블 다리를 훑고 지나간다.

"꼬륵…"

작지만 선명한 소리다.
정지된 듯한 이 시간에 가장 먼저 금을 내는 것은 내 예상대로 아주 사소한 이 생리적 신호다.
뱃속이 비틀리듯 당겨 온다.
너무 익숙해서 설명조차 필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무뎌지지는 않는 이 감각.
내 몸이 이제 완전히 잠에서 빠져나온 것을 위장으로써 제 존재를 분명하게 주장한다.
아, 생각보다 더 배고픈데?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굳게 닫힌 김선아의 방문이 보인다.
안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방음이 잘된 건지 아니면 저 방 안의 그녀의 세계가 아예 세상과 단절된 건지 알 수 없다.
오늘의 아침 식사는 김선아의 차례다.
하지만 지금쯤이라면 아직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햇빛이 방 안으로 스며드는 걸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아마 커튼 사이로 새어든 빛에 먼저 눈살을 찌푸리고 신경질적으로 창가부터 정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뒤의 흐름은 늘 비슷하다.
김선아는 한차례 빛을 밀어내듯 커튼을 정리한 뒤, 다시 이불과 뒤엉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생활 패턴이다.
나는 이런 인간형에 대해 어렴풋이 배운 적이 있다.
탁아원¹ 시절, 스마트 월을 통해 진행되던 수업 시간이었다.
화면 속 강사는 늘 그렇듯 지나치게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주행성 인간과 야행성 인간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것이 단순히 생활 습관이나 수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 사람이 머무는 자리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햇볕 속에서 안도하고 누군가는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숨을 쉰다.
단언하자면 김선아는 후자에 가깝다.
밝은 빛을 불편해하고 대화보다는 침묵을 더 자연스럽게 택한다.
그러나 단순히 늦게 일어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의 쌍둥이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그저 세상과 맞닿는 방식마저 어딘가 한 걸음 비껴나 있는 사람처럼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경계를 분명히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그녀가 눈을 뜨기까지는 아직 두세 시간은 더 남았다는 것.

"…"

방문에서 시선을 거둔다.
대신 탁자 위에 놓인 둥근 아날로그 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짧은 시침은 8과 9 사이를 조심스럽게 넘어가고 있고 초침은 바늘 끝으로 시간을 긁어내듯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미세한 운동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튼다.
그 옆에는 작은 액자가 하나 놓여 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유년기의 끝자락에 찍힌 나의 마지막 가족사진.
그 안에는 오래전의 얼굴들이 남아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지금 이 공간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온도를 띠고 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속에서 색이 바랜 종이 위에서만 살아 있는 사람들.
손끝으로 액자 표면을 천천히 훑는다.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유리 위로 빛이 부서지고 이 액자 속엔 오래전의 웃음들이 조용히 갇혀 있다.
사진 속 사람들은 여전히 그날의 햇살 아래 머물러 있다.
16년 전, 동모² 국제공항.
그날 이후, 나의 세상에서 가족이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공항에서 벌어진 테러 참사는 너무 많은 것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하던 이들의 손길을 잃고 홀로 남겨졌다.
단일 테러 사건으로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많은 인명이 희생된 그 사건 이후로 시간은 참 잔혹할 만큼 무심하게 흘렀다.

"국가가 여러분의 사회구조적 보호자 역할을 수행한 것은 오늘부로 그 임무를 다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세상에 서는 성인입니다. 자랑스러운 기려³국의 시민으로서, 민주사회의 일원으로서, 더 나은 공동체와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체가 되길 바랍니다. 국립 옹천⁴ 탁아원은 여러분의 이수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끝이지만, 그것은 또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는 모든 이수생들의 앞날에, 용기와 지혜 그리고 행복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원장의 목소리는 낡은 스피커의 잡음을 타고 천천히 울려 퍼졌다.
형식적인 축사였고 문장마다 정형화된 따뜻함이 묻어나왔다.
그 속내는 관료적인 단절의 통보였다.

"이제, 너희는 보호받지 않는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을 너무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늘 떠들어대던 보호자라는 단어가 화염 속에서 사라져 간 나의 친부모처럼 실제로 언젠가 다가올 이별의 통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국가가 만든 울타리에서 밀려나는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사가 끝나자 거짓말처럼 박수가 쏟아졌다.
아이들은 졸업장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고 몇몇은 억지로 웃었다.
나도 그 틈에 서 있었다.
그때, 내가 손에 쥔 종이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단지 어떤 구조의 첫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자격증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내가 느끼고 있던 막연한 불안보다 세상이 더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은 정해진 거처가 사라졌다.
나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사회라는 기계 속에 톱니바퀴로 끼워졌다.
내 나름대로 자립의 준비를 해왔지만 그것마저도 충분하지 않았다.
탁아원에서 배운 교재 속의 말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좁다란 국토 대비 기이할 정도로 범죄율이 높은 이 기려라는 나라는 선의보다 효율을 정직보다 요령을 요구했다.
나는 점점 그 어두운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투명해졌다.
투명해진다는 건 내 양심을 지우는 일이었지만 덜 아프게 덜 힘들게 사는 방식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그 거대한 기계 속으로 들어갔고 몇 해가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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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모 국제공항 테러 실종자 수사 관련으로 조사할 것이 있으니 서루시⁵ 경찰청 실종수사과로 출석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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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 그 메시지를 받았을 때, 그저 착오이거나 보이스 피싱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십수 년이 지난 사건이었다.
이미 언론에서도 사람들의 입에서도 사라진 일을 이제 와서 무슨 조사를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실종자 수사라는 단어는 나에게 마치 오래전 기억의 무덤을 다시 파헤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까지 나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살아왔다.
남아 있을 리 없어.
그 지옥에서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어.
그리고 조사실의 문이 열리던 날.
나는 자기를 어렸을 때, 잃어버린 가족이라고 밝힌 한 여성과 마주했다.
첫인상은 낯설었다.
그러나 그 낯섦 속에 묘하게 자신과 닮은 무언가가 있었다.
얼굴의 윤곽이나 이목구비의 배치.
그 모든 조각이 하나로 엮이며 내 앞에서 현실감 없는 재회의 형상을 이뤄냈고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나는 그것을 여전히 기적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기적이라 하기엔 아직도 나의 쌍둥이는 나에게 그만큼 멀다.
딱히 그녀와 나 사이에 추억이라 할만한 것도 없고 서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조차 길게 얘기 한번 나눠본 적이 없다.
그녀와 나를 묶고 있는 것은 그저 피가 이어졌다는 사실뿐인 것 같다.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여전히 김선아의 내면 어딘가 그녀가 감추고 있는 어두운 장막 뒤에 감춰져 있다.
그럼에도 자주 이런 생각을 든다.
내 삶이 이만큼 평온하게 굴러가는 건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라는 것을.
여태껏 교육받아 왔던 모든 사회와 경제에 대한 관념이 무색하게 저 외계의 고단함으로부터 나 자신을 유리되어 있게 만들어준 그녀에게 감사하다.
그러나 어쩐지 불편하다.
감사함과 불편함이 동시에 들러붙은 이 감정을 나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아온 공간은 언제나 좁다는 감각으로 정의되었다.
탁아원의 4인실은 늘 사람 냄새로 가득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코고는 소리가 들리고 밤마다 이불의 뒤척임이 방안을 울렸다.
사생활이란 개념은 거의 없었다.
공간도 물건도 항상 공유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수를 마친 뒤, 나의 삶은 그곳과 비슷한 옥탑방으로 옮겨졌다.
태풍이 부는 날이면 창문 틈새로 물이 스며들어 귀찮게 했고 겨울엔 난방이 잘 되지 않아 내 숨이 입김으로 허공에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좁고 불완전한 공간 안에서 나만의 리듬을 만들어가며 살아남았다.
작은 전기 매트 하나와 커피포트.
그게 전부였지만 오히려 그 단출함이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래서 지금, 이 과분하리만큼 넓은 평수의 아파트는 나에게 마치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나와 함께 살자. 이제 여기서 지내."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결단코 이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방과 방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쓸쓸하게 울려 퍼진다.
넓고 정돈되어 있고 안전하며 추울 때는 따뜻하고 더울 때는 시원한 공간.
너무 완벽해서 현실감이 없다.
처음의 며칠은 공간 그 자체가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낯설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곳은 모든 게 너무 깨끗하고 정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너무 적막하다.
이 적막한 공간만큼이나 이곳의 주인인 김선아 역시 무뚝뚝하다.
이건 단순한 성격의 문제라기보다 그녀가 후천적인 이유로 마치 감정이란 기능이 오래전부터 마모된 것처럼 보인다.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지되 결코 깊이 들어갈 수 없다.
내가 무언가를 물으면 김선아는 말을 하긴 하지만 주로 대답 대신 짧은 시선이나 손짓으로 반응한다.
그마저도 어쩐지 기계적인 반응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행동에는 언제나 일관된 배려가 있다.
이를테면 항상 현관 앞의 나의 신발은 늘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되어 있다.
마치 누군가 눈금자를 들고 잰 것처럼 정확하게.
그뿐만이 아니다.
옷장 속의 내 옷들은 색상과 계절 순서대로 정돈되어 있고 세탁된 의류는 구김 하나 없이 곧게 접혀 있다.
방안의 쓰레기통은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비워지며 내가 무심코 흘려둔 컵은 다음 날, 깨끗이 씻긴 채 제자리에 돌아가 있다.
김선아의 배려는 그런 식이다.
정돈과 침묵으로 이루어진 무언의 보호.
그녀의 손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 구석구석에 조용히 스며 있다.
그러나 그런 세심함조차도 그녀가 스스로의 무뚝뚝함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낸 혼신의 노력에 가까워 보인다.
특히 식사를 할 때에 이런 면이 더 도드라진다.
김선아는 식탁 위에 밥을 차려놓은 뒤, 먹으라는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어색하게 머물다 사라진다.
그건 서툴지만 많은 진심이 숨어 있다.
그것이 늘 나의 마음을 다소 아프게 한다.
그토록 무감정한 누군가가 내 자신을 그렇게까지 인간적으로 대하려 애쓰는 모습은 오히려 더 비인간적인 슬픔을 불러온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그 섬세한 질서를 바라보며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낀다.
그 배려는 분명 따뜻하지만 동시에 너무 완벽해서 인간적이지 않다.
그리고 김선아는 새벽이면 자주 깨어 있다.
거실의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서서 태영시⁶의 야경을 말없이 바라본다.
그때의 그녀는 평온해 보였지만 고요함을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정적 속의 대기 상태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김선아가 단순히 무뚝뚝한 인간이 아니라 훈련된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몸짓은 이상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고 목소리의 억양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철저히 감정을 지워내어 불필요한 표현은 일절 없고 마치 사람의 생사가 짧은 명령 한 마디로 좌우되는 어떤 세계를 통과해 온 사람처럼 후천적인 습성과 천성이 맞물려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나의 쌍둥이는 결단코 평범한 시간 아래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종종 궁금하다.
김선아는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살아온 걸까?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입에서 직접 나오기 전까지 결코 알 수 없는 종류의 진실이다.
김선아는 자신의 과거를 견고한 침묵의 봉인 아래 단단히 눌러두었고 나는 그 봉인을 건드리는 일이 그녀에게 실례가 될까 두려워 아직은 그 경계를 넘어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감사함은 언제나 불편과 함께 머무르고 안락함은 점점 죄책감 비스무리한 감정으로 변질되어간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침울히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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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 택배 도착하였으니 수령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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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길고 낮은 알림음이 나의 상념을 깨뜨린다.
천천히 눈을 뜨자 현관쪽 벽에 박혀 있는 월 패드가 희미한 초록빛으로 점등되어 있다.

*    *    *

총 28층으로 이루어진 이 아파트에서 14층은 유일하게 주거 공간이 아닌 층이다.
입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상용 무인기들이 대형 화물을 임시로 수납하는 소위 택배층이라 불리는 곳.
항상 사람의 발길이 드물고 외부에서 흘러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메아리치는 공간이다.
승강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수납 층 끝에서 은은한 바람이 흘러온다.
도심의 상공 저편으로는 사익형 무인기 한 대가 막 배송 임무를 마친 듯 노란 신호등을 점멸하며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
기체는 날카로운 비행선을 그으며 빌딩 사이로 사라졌고 이 자리에 남은 건 커다란 그림자 하나다.
수납 구역 한가운데에 냉장고만 한 크기의 파란색 상자 하나가 고요하게 누워 있다.
그것에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바닥에는 무인기의 착륙 흔적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고 화물의 전면에는 인식 태그가 붙어 있다.
검정색 라인 안에 복잡한 코드가 빼곡히 새겨져 있지만 정작 수신자 정보나 발신지 기표는 보이지 않는다.
비정상적인 표기 방식이다.
이 화물을 누가 보냈는지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다.
일단 화물의 하단을 잡고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볼까?

"흡…!"

예상보다 훨씬 묵직한 무게가 손끝으로 내려앉는다.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다.
화물용 승강기 옆쪽에 구비된 대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다행히 저 대차가 나에게 사용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자세히 보니 화물의 하부에 바퀴가 달려 있다.
운반을 위한 목적으로는 최소한의 장치이면서 동시에 충분한 구조다.
그 작은 바퀴들은 마치 이 커다란 화물을 단 한 명의 인력으로도 옮길 수 있도록 계산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양손으로 상자의 윗모서리를 단단히 붙잡고 조심스레 밀어본다.
바퀴가 바닥을 긁으며 낮고 묵직한 마찰음을 낸다.
화물은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
움직일 때마다 무게감 있는 울림이 바닥을 타고 퍼져나가고 고요하던 수납 층의 정적을 조금씩 밀어낸다.
그러다 결국 화물용 승강기 앞에 닿는다.
숨을 가다듬은 뒤, 두 팔에 힘을 모아 화물을 승강기 안으로 마저 밀어 넣는다.
승강기 벽에 부딪혀 둔탁한 충돌음이 울리자 화물이 제자리를 잡는다.
층수를 입력한 후, 뒤로 물러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층수의 버튼이 조용히 점등되고 승강기 문이 닫히자 수납 층 안에 희미한 정적이 깃든다.
남은 것은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안에서 울려 나오는 무겁고 낯선 무언가가 내는 둔중한 진동뿐.
진동은 층을 타고 묘하게 숨 막히는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상승하고 있다.

*    *    *

집으로 돌아왔다.
손잡이를 돌려 발코니의 문을 연다.
본능적으로 숨이 골라진다.
실내인 듯 실외인 듯 닫힌 공간이면서도 바깥의 냄새가 희미하게 스며있는 애매한 공기가 한순간 살갗을 스친다.
그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의 도심은 소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지만 이 발코니 안쪽은 낮은 햇빛만 옅게 비칠 뿐 그 소란이 닿지 않는 고요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고요 한가운데에 승강기 안쪽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 아파트의 대형 화물 배송 체계는 입주민들이 대형 화물을 수납 층에서 실내로 손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다.
각 세대의 발코니 한편에는 화물용 승강기 도어가 연결되어 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수납 층과 거주 공간이 단숨에 이어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승강기 안쪽으로 들어간다.
화물이 제법 커서 좀 비좁지만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간다.
화물을 천천히 밀어내어 발코니 쪽으로 민다.
수납 층의 먼지 냄새가 화물과 함께 발코니로 흘러들며 짧은 잔향처럼 흐른다.
이 묵직한 화물을 마저 밀어 거실 한가운데에 둔다.
다 옮겼네, 그런데 뭐가 들은 거지, 열어볼까?
아니다.
화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시선을 김선아의 방으로 옮긴다.
문 앞에 서서 손끝으로 두드리듯 노크한다.

"일어났어? 택배 온 것 같은데?"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안 들렸나?
이번엔 좀 더 힘주어 소리가 안쪽까지 닿도록 두 번째 노크를 한다.

"택배 왔어!"

그러나 여전히 응답은 없다.
대답 대신 침묵만이 되돌아온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는다.
손에 닿은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묘하게 생생하다.
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거의 숨을 죽인 채로 천천히 문을 연다.

"…"

없네?
김선아는 이곳에 없다.
이불은 그녀답지 않게 어지럽게 뒤틀려 있고 평소 머리맡에 두던 차 키 역시 사라져 있다.
외출한 건가?
고개를 현관으로 돌린다.
그러고 보니 현관 근처에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할 신발 두 짝이 없다.
그녀는 어떤 이유로든 잠시 나간 것 같다.
그 외에는 특별히 짐작할 것이 더 이상 없다.
그녀는 늘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오는 사람이다.
시선을 돌린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화물의 존재감이 실내의 공기를 묵직하게 메우고 있다.
나의 관심은 다시 그것에 향한다.
엄청 크네.
그냥 눈을 떼기에는 알 수 없는 충동이 작게 일렁이며 내용물을 알고 싶다는 호기심의 불꽃이 서서히 피어오른다.
이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탁아원에서 원사⁷들의 눈을 피해 열어보았던 타임캡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제 그 비루한 시절은 많이 지나왔고 어른이라면 충동적인 행동보다는 먼저 망설임이 있어야 한다.
허락도 없이 남의 택배를 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
더구나 이건 단순한 택배가 아니다.
크기부터가 비정상적으로 크다.
냉장고만 한 크기에 인식 태그 외엔 아무 표기도 없는 불분명한 화물.
그저 호기심만으로 손을 대기에는 이 안에 담긴 무언가가 섣불리 다뤄선 안 될 것 같은 종류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거대한 상자가 발코니를 통과해 거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막연한 답답함이 느껴진다.
이게 정말로 답답함인지 아니면 열고 싶단 내 욕망의 합리화인지는 제쳐두고 이렇게 포장된 상태로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직감이 있다.
나의 직감을 믿어본다.
만약 이게 가구이거나 그와 비슷한 류의 물건이라면 김선아와 같이 조립하기 위해서라도 대략적인 구조는 파악해 두는 편이 좋을 터이고 어차피 분리배출할 포장재는 미리 치워두는 편이 낫다.
결국 화물에 한 발짝 다가가 나의 쌍둥이에게 한 마디의 변명을 속삭인다.

"확인만 할게, 미안해."

변명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순간, 이미 나는 파란색 포장의 끝을 잡고 있다.
그리고 나의 변명은 생각보다 손쉬운 면죄부다.
결심이 굳자 내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포장은 금세 찢겨나간다.
질긴 포장지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거실의 공기와 같이 흩어진다.
바닥엔 순식간에 잔해가 늘어지고 잔해 속에서 유선형의 매끄러운 백색 동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이게 뭐지?
내가 포장을 벗길수록 이것의 실체는 더 낯설어진다.
정체는 드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모호해지고 있다.
남은 포장재를 모두 걷어내 한쪽으로 모은다.
쪼그려 앉은 채 표면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가전제품이라기엔 너무도 유려한 선에 예술 조형물이라기엔 너무도 기능적인 형태.
동체는 완전히 매끈하고 마감선 하나 보이지 않는다.
몸을 낮춰 여러 각도에서 살핀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전원 단자나 제조 표식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측면 한쪽에 손가락 하나만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틈이 있다.
그 틈새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마치 숨을 쉬듯 리듬을 이루며 점멸하고 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잠시 숨이 멈춘다.
왠지 저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넣어볼까?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런 망설임이 생기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가끔 자세한 이해보다 먼저 감으로 위험을 알아차리곤 한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다만 지금만큼은 나는 나의 직감을 배반하고 싶다.
이미 나는 낯선 기계와 함께 살고 있다.
또 하나의 낯선 기계를 이 공간 안에 들인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불편해질 것도 없고 그저 지금은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
그저 호기심이다.
천천히 틈새로 손끝을 가져간다.
손가락이 틈새 깊숙히 들어가자 짧은 정전기가 터진다.
아, 깜짝이야.
손끝을 타고 그 자극이 전류처럼 번져 올라온다.
그러나 피부 아래로 퍼지는 이 감각은 단순한 전류가 아니다
따가운 전기가 마치 살아 있듯 내 손가락을 따라 감아올라 온다.
전류가 손끝을 휘감으며 얇은 전기장이 형성되고 희미하게 푸른빛이 손끝에서 맥동하며 피부 위를 타고 흐르는 미세한 자극이 살아 있는 신경처럼 움직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반사적으로 손을 뺀다.
그런데 이미 무언가가 반응하기 시작한다.
내가 손가락을 넣은 틈새로부터 흘러나간 잔광이 하얀 동체 전체로 스며들듯 퍼져나간다.
거실의 공기가 울린다.
낮고 깊은 진동음이 터져나온다.
공기가 떨리며 바닥 아래에서부터 미세한 공명이 올라온다.
가동음은 점점 깊어지고 실내의 채도가 변한다.
차가운 백색은 점차 푸른빛을 머금으며 저 정체 모를 동체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싼다.
나는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선다.

"뭐야, 대체…"

동체의 표면을 따라 빛의 선들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 선들은 마치 그 안쪽에서 멈춰있던 회로가 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유려한 표면마다 얇은 빛의 선이 새겨져 발광하고 곧 하나의 유기적 형상으로 이어진다.
이내 외피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걸쇠가 풀리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한다.
열리고 있어?
아니다.
일반적인 개폐의 형태가 아니다.
단순히 열린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저건 마치 퍼즐이 해체되는 듯한 움직임이다.
하얀 강판들은 일정한 패턴으로 분리되어 공중에서 서로의 궤적을 정교하게 피하며 움직인다.
와중에도 내 손끝엔 기묘한 전류가 감전의 잔상처럼 남아 있다.
마침내 내부가 드러난다.
안쪽에는 빛을 은은하게 반사하는 반투명한 액질이 천천히 출렁이고 있고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이제 막 깨어난 듯 숨을 쉬고 있다.

"푸후아아극!"

붉은색 액질은 미세한 진동과 함께 숨을 쉬듯 부풀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푸후으…"

저것이 내쉬는 공기는 묘하게 달아 있고 표면이 미세하게 파문을 일으킬 때마다 느린 맥동이 느껴진다.
나는 숨을 삼킨다.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진다.
내가 이걸 왜 건드린 거야.
저질렀다는 후회가 계속 머릿속을 스친다.
여전히 시선은 반투명한 액질에 붙들린 채 정적이 흘러간다.

"감사합니다! 당신은 지금, 혁신의 미래를 여는 첫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본 폴스후드 사⁸의 차세대 가상현실 구현 장치! 이제 막 깨어났습니다! 와우!"

갑자기 터져 나온 음성에 반사적으로 몸이 굳는다.
어딘가 지나치게 명랑하고 인위적인 억양이다.

"오, 지금 저 미러 핸드⁹를 깨워주신 그쪽이… 바로 대망의 그 첫 가동자님이신가요?"

자신을 미러 핸드라고 자칭하는 저 기계의 음성은 단순한 녹음이 아닌 것 같다.
과장된 낙관 속에 머무는 광고성 억양은 분명 실시간 반응을 품고 있다.
그리고 미러 핸드는 여전히 가만히 있는 나를 감지하여 잠시 멎은 듯하더니 다시 생기를 띤다.
이제는 어딘가 장난기 섞인 억양으로 거실의 공기와 하나로 섞이며 더 친근해진다.

"이런! 제 말이 들리지 않으시나 보군요? 제가 초저주파로 말을 건넸나 봅니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
나는 저 기계의 매끄러운 동체를 멀찌감치 바라보며 숨만 고른다.
그러자 미러 핸드의 음성이 한층 부드러워진다.

"괜찮습니다, 익숙하시지 않죠? 저도 이렇게 다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이 참… 반갑네요…"

너는 지금 상황이 반갑겠지만 나는 아니라구!
무언가 입을 열긴 해야겠기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혹시… 전원을 끌 수 있을까요?"

내가 생각해도 내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깨어나자마자… 이렇게 매정하게 구시다니요.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벌써 저를 재워버리시려는 건가요?"

이런 반응은 상당히 당황스럽다.
저 목소리에 실린 감정은 연극적인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아, 그런 뜻은 아니라. 그건… 아니… 당신은 제 물건이 아니라서요."

나는 재빨리 그럴듯한 변명을 꺼내본다.
물론 사실이기도 하다.

"아! 그렇군요… 가동자님이 원래 주인이 아니셨군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원래 소유주분이 오시기 전까지, 잠깐 체험만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잠시 낮아지는가 싶던 미러 핸드의 음성은 점점 속도를 높이며 들떠간다.

"저는 장악하고 있는 기능이 아주 많습니다! 전신 테라피, 홀로그램 허공 투영, 심상 제어, 기체 투명화 그리고… 대망의 가상 현실 구현까지!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시연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자, 어떠신가요?"

그 말을 끝으로 기계의 내부에서 희미한 빛이 다시 일렁인다.
동체 내부에 잠겨 있는 반투명한 액질이 느리게 분명하게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파문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붉은 풍선처럼 솟아올라 사람의 형상으로 굳어진다.
키는 어린아이만 하지만 얼굴은 과장된 미소를 띤 광대의 형상.

"원래 소유주분께는… 흐음… 특별히 비밀로 해드리죠. 그분이 오셨을 때, 아니면… 오시기 전에 제가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정도 능력은 있거든요!"

액질로 된 광대 형상이 나에게 천천히 손짓을 한다.
저것의 손끝에서 반짝이는 빛이 퍼져나가며 양서류의 물갈퀴처럼 번진다.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이리로 오셔서 그냥 눕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가…"

미러 핸드는 웃음을 크게 지으며 두 팔을 펼친다.

"이렇게… 감싸드리죠! 아주 안전하고, 아주 포근하게! 단, 한 번만 경험하셔도 다시는 현실이 이전 같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은, 이 미러 핸드의 이름을 걸고 진심으로 맹세합니다."

반투명한 광대 형상의 액질은 미소를 멈추지 않은 채 여전히 자기 쪽으로 오라는 듯 나를 향해 손짓한다.

¹ : 托兒院
² : 銅矛
³ : 基麗
⁴ : 甕泉
⁵ : 西淚市
⁶ : 太寧市
⁷ : 院師
⁸ : Falsehood Corporation
⁹ : Mirror Hand

※ 의성어에 큰따옴표를 붙인 것은 이를 육체가 스스로 발화하는 듯한 바디호러적 감각의 몸의 대사로 처리하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