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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하드코어 액션 소설]어비스 셀 제로:두 여왕(Abyss Cell Zero:The Two Queens)-짐승들의 천국
jgkjustcreat 2026. 1. 29. 13:41
본래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군인의 신분이었다.
그녀의 집은 전장이었고 그녀의 일상은 전투뿐이었다.
다만 그녀가 군인으로서 훈련받았던 이유는 평화의 수호와 조국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의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권한을 쉽게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군인이기 이전에 포식자였다.
전쟁 포로들을 은밀히 유린하고 처형이 필요할 때면 자진하여 그 역할을 맡았다.
부하들을 협박과 위력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추행하게 했고 민간 구역에서 몰래 숨어들어 강도와 방화를 일삼았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에게 그 모든 행각들은 자극적인 유희처럼 느껴졌고 그녀는 전장의 틀 안에서 자신의 충동을 단 한 번도 제어해 본 적이 없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극비 실험에 자발적으로 몸을 내맡겼다.
프로젝트 루시펠¹.
그것은 볼모르² 행성 사령부가 추진한 군사력 고도화 계획의 핵심이었으며 차세대 전장을 위한 유전자 기반 슈퍼 솔저 개발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품고 있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그것의 첫 번째 실험체이자 최초의 자원자였다.
그리고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형태를 유지한 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모든 측정 수치에서 안정적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존재가 탄생한 그날에 볼모르 행성 사령부가 완벽한 생체 병기의 탄생을 자축하며 축배를 들은 그날에 연구 단지의 비상 보안 프로토콜은 가동되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더 이상 통제받을 의사가 전혀 없었다.
자신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말종의 본능을 거리낌 없이 표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진 그녀에게 있어 이제 옳고 그름은 무의미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누군가의 통제에 맞춰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 의미가 상실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성이 아니라 본능으로.
도덕이 아니라 욕망으로.
오직 내키는 대로.
그렇게 연구 단지를 초토화시키고 행방을 감추었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총 세 곳의 위성이었다.
그곳들은 다행히 인구 희박의 불모지들이었으나 그녀가 거쳐간 이래로 광물 채굴 기지로서의 기능 자체가 모두 마비되었고 보안 병력을 포함해 민간 기술 인력 대부분이 압궤성 전신 파열로 사망하였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에 멀쩡히 무사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수색대는 오직 심각한 신체 손괴와 함께 정신 착란 증상을 보이는 폐물들만을 구조할 수 있었다.
이에 볼모르 행성 정부는 단 한 명의 범죄자를 구속하기 위해 전례 없는 작전을 시행했다.
작전에는 무려 전술 함선과 중력 구속 위성이 동원되었고 투입된 병력의 사상자 수치가 육백에 이른 끝에야 어비스 셀 제로³의 인공지능 네메덱스⁴는 새로운 수감자에 대한 정보를 기록할 수 있었다.
* * *
짐승들의 천국에 이르는 길은 어떠한 설명도 없는 그저 추락일 뿐이었다.
이곳의 진입 방식은 왕왕 이런 식이었다.
중력은 몸을 붙잡아 사정없이 짓눌렀고 오래된 죄의 악취로 물든 어비스 셀 제로의 공기를 새로운 수감자의 폐 속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드랍 포드⁵보다 먼저 발을 들여 배출구에서 쏟아져 내린 하얀 안개는 이 일대를 장악한 슬로우 브리더즈⁶의 입출 통제 구역을 자욱하게 집어삼켰다.
그 백색의 장막은 드랍 포드가 고중력 역장에 걸려들며 급감속으로 속도를 줄일 때, 발생된 마찰열이 물질을 기화시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연무를 한 모금 들이마시면 절로 기침이 터지고 폐가 뜨겁게 쓰렸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은 짐승들은 그 매캐한 숨맛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이 지옥에 인두겁을 쓴 악귀들이 강림할 때마다 모두가 같은 맛을 보았으니까.
그 광경을 익숙하게 지켜보던 이들 중 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신선한 고기가 왔군."
담담하게 떨어진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연무의 심층에서는 한 박자 늦게 검은 그림자가 떨어졌다.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지만 폭음은 없었다.
대신 뼈를 타고 오르는 둔중한 중량의 파동이 일대를 훑으며 드랍 포드가 착지했다는 사실을 청각이 아닌 촉감으로 전달하였다.
연무는 아직 걷히지 않았고 드랍 포드 안의 형상은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크기만은 분명했다.
연무 너머로 드리운 압도적인 윤곽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몇몇은 본능처럼 자리를 피했다.
다시금, 드랍 포드 외벽의 이음매에서 하얀 연무가 고압의 증기처럼 분출되었다.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새로운 기압은 드랍 포드의 하부로 낙하하듯 낮게 흐르며 이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뿌연 연무층을 거칠게 밀어냈다.
사방으로 쓸려나간 백색의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중심부에 서 있던 새로운 수감자의 형상이 응축된 증기 너머로 또렷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형상이 마침내 연무 너머에서 한 걸음 나왔다.
"허어으읍!"
막 수면 위로 떠올라 겨우 숨을 트는 사람처럼 새로운 수감자는 어비스 셀 제로의 공기를 들이켰다.
그러다 폐에 박혀 있던 노폐물이 빠져나가듯 기침과 함께 허파가 찢어질 듯한 숨을 토해냈다.
거칠었지만 기침에 실린 음색은 맑고 높았다.
그것에 죄수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여자다!'
시각보다 빠르게 작동한 청각은 그 완연한 미성 속에서 원초적인 무언가를 빠르게 인지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눈은 분명히 새로운 수감자를 여자라고 인식했다.
가슴과 골반을 위시한 신체 구조가 명백히 저것이 여성이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썰미가 좋은 몇몇은 이미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두 번째 호흡에서 그 판단을 수정했다.
그녀는 너무 크고 너무 단단해 보였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상식을 넘어선 체격과 근육의 밀도는 이 지옥의 기준으로도 과했고 마치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신장은 드랍 포드 내부에 맞추기 위해 접혀 있었던 탓에 이제야 간신히 펴지는 중이었고 중력 구속에서 완전히 풀려난 그녀의 관절들은 이제야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며 기계처럼 불쾌한 마찰음을 냈다.
그리고 중력에 순종하며 가슴께까지 내려왔던 주황빛 머리카락 사이로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눈이 드러났다.
그 시선을 직시한 죄수들은 이유도 모른 채 다리에 순간,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반응들과는 무관하게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눈앞은 여전히 희미한 안개처럼 번져 있었다.
그녀는 아직 강하의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고 물상과 물상 사이의 경계가 녹아내리듯 흐릿하게 뒤틀린 시계 앞에서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려 천천히 윤곽을 되찾는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죄수들은 그러한 사정을 알 턱이 없었다.
뒤이어 거대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도와주세요…"
마치 어미를 잃어버린 짐승의 새끼 같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고 그 울음소리는 일대의 정적을 걷어내며 명확하게 번졌다.
그 순간, 그것에 누군가가 반응했다.
여전히 녹아내린 물상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망막 한가운데로 어두운 형상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쇠와 바닥이 부딪히는 경쾌하면서도 불온한 소음.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의식을 짜내듯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처음에는 안개였으되 다음에는 사람의 형상이 되었으며 이내 사지의 움직임이 또렷해졌다.
초점이 다시 맞춰지며 시계가 선명해지는 순간, 그녀는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기형적으로 깡마른 상처투성이의 흉악한 광인이 붉은 녹이 벗겨진 쇠 파이프를 손에 거머쥔 채 전속력으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의 다른 죄수들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시에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RM-12042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급한 새끼.'
그러나 기대에 무색하게 비명이 먼저 터진 쪽은 RM-12042가 아닌 다른 쪽이었다.
"꺄아아악!"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고 거대한 체구가 수축했다.
견고한 두 팔이 머리를 감싸 쥐며 팔꿈치와 전완의 근육이 단단히 부풀어 올랐고 주황빛 머리카락이 얼굴을 완전히 덮었다.
그 모습에 달려들던 RM-12042의 눈빛에는 미묘한 동요가 스쳤다.
하지만 그는 돌진을 멈추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이미 발사된 탄환과 같이 맹렬하고 직선적이어서 그 누구도 지금의 자신을 멈춰세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쇠 파이프는 내리쳐졌다.
"…이런, 씨."
그러나 그의 쇠 파이프는 고기를 때리지 못했다.
그것이 부딪힌 것은 한껏 몸을 욱여넣은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윗쪽으로 정확히는 그녀의 팔을 스치듯 지나 벽체를 강하게 때렸다.
RM-12042는 손아귀에 전해지는 얼얼한 충격을 뒤로하고 본능적으로 재빨리 물러서 다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가까이서 마주한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체구를 다시금 확인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육중했고 숨을 죽인 채 웅크린 크기조차 어지간한 죄수들보다도 거대했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 조용히 떨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떨림 속에 폭풍의 전야 같은 위화감이 있었다.
그때,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사, 살려주세요."
목소리는 너무 작고 너무 연약한 것처럼 느껴졌으나 그 음성을 듣는 순간, RM-12042는 뼛속 깊이 새겨져있던 본능적인 경계심이 다시 피어올랐고 그는 쇠 파이프의 끝을 발레리아 헬스트롬에게 겨눈 채 흉포한 기세를 되살리듯 소리쳤다.
"지랄하지 마!"
광기 어린 눈빛이 번들거리며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RM-12042의 일그러진 입매와 잇새로 거칠고 축축한 숨이 튀어나왔다.
"안 속아! 그딴 덩치로 기어들어와선 이 미친년아! 난 안 속는다고!"
그의 고함은 더 이상 외침이라기보다 짖어댐에 가까웠다.
마치 적의의 방향이 그녀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겁을 먹은 스스로를 타박하듯 자학에 가까워 보였다.
그 증거로 움켜쥔 쇠 파이프의 끝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RM-12042의 쇠 파이프는 조심스럽게 조금 더 발레리아 헬스트롬에게로 다가섰다.
차가운 금속성 감촉이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팔 위로 드리워졌고 그 온도에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을 드러내지 않았고 대신 팔 사이에서 낮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사, 살려주세요. 그것 좀 치워주세요… 흑흑…"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팔을 더 끌어안으며 몸을 작게 웅크렸고 떨리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거대한 흉곽이 불규칙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움츠림에 RM-12042의 숨결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녀의 흐느낌과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한 것처럼 여겨져 더욱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지랄하지 말라 했지! 지랄하지 말라고! 지랄하지 말라고! 지랄하지 말라고오!"
마지막 외침은 괴성에 가까웠다.
목이 쉬어 갈라진 소리가 울부짖듯 튀어나왔고 쇠 파이프를 쥔 손이 기어코 크게 들렸다.
영문 모를 분노도 섞여 있었지만 끝내 억누르지 못한 공포가 터져 나온 듯 그의 음성은 불안정했다.
마침내 살을 때리는 소리는 공기를 찢었다.
그 소리는 그녀의 의식을 뭉개뜨리듯 둔탁하게 울렸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머리는 옆으로 꺾였고 움츠려있던 거대한 덩어리가 천천히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광경에 관망하던 죄수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쳐간 생각은 이것이었다.
'…저 덩치가, 고작 저거에 뻗는다고?'
이후, 뒤늦게 치밀어 오른 후회가 죄수들을 잠식했다.
저따위에 겁을 먹고 간을 보려 한 자신들이 못나 보였고 먼저 손을 뻗지 못한 아쉬움이 첫 기회를 빼앗긴 듯 뱃속에서 끓어올랐다.
한편, 쇠 파이프를 쥔 RM-12042는 도리어 작금의 사태에 당황한 듯 소리를 흘렸다.
"야, 이 덩치에… 진짜야?"
방금 전까지의 경계는 그대로 혼란으로 굳어 있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다가서 쇠 파이프의 끝으로 바닥에 쓰러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어깨를 건드렸다.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갈비뼈 근처를 찔렀다.
숨소리도 훌쩍임도 방금 전까지 있던 떨림조차 뚝 끊긴 채 그녀는 멈춰있었다.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은 RM-12042는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마침내 쇠 파이프를 거두었다.
대신 이제는 맨손으로 바닥에 쓰러진 팔을 더듬듯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선명한 감촉에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씨발… 존나게 딴딴하네."
근육은 살아있는 생물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밀도가 느껴졌고 기이할 만큼 단단했다.
RM-12042는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듯 이번엔 뺨을 두드렸다.
그래도 그녀는 미동이 없었다.
그는 침을 삼키며 시선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흉부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곽에 시선이 붙들린 채 별다른 생각 없이 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지나치게 단단하고 거대한 몸뚱이에 어울린다 해야 할지 이질적이라 해야 할지 노골적으로 큼지막한 여성의 상징에 죄수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그는 대담해진 손놀림으로 잠시 그 부드러운 형태를 만지작거리고 정신없이 탐닉하다 문득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었는지 고개를 쳐들었다.
뒤로 고개를 돌리자 일대에 남아있던 죄수들이 슬그머니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그 면면에 떠오른 노골적인 소유욕을 단번에 파악한 RM-12042는 재빨리 발치에 떨어진 쇠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그것으로 사방을 겨누며 소리쳤다.
"죽인다, 병신들! 다가오지 마!"
RM-12042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섰다.
그런 다음 쇠 파이프를 강하게 움켜쥔 채 허공에 휘둘러 자신과 나머지 죄수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
"다 죽여버린다! 이년은 내 거야! 니들 차례는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내 다음이야!"
그 말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죄수들이 서로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며 으르렁거리는 틈새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눈꺼풀이 열렸다.
깜빡임도 없이 열린 두 눈은 감정을 찾아볼 수 없이 냉혹했다.
그리고 마치 전원이 들어온 기계처럼 시선은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눈동자는 사방을 훑기 시작했다.
왼쪽과 오른쪽.
천장과 벽.
움직이는 죄수들의 그림자들.
자세와 거리.
정보를 수집하듯 위험 요소를 계산하듯 맹렬하게 움직이다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점은 자연스럽게 너무도 정확하게 RM-12042의 뒤통수에 고정되었다.
그는 그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이 상반신부터 천천히 일으켜 완전히 몸을 세우자 뜨겁게 달궈지던 기류는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다가오던 죄수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고 그것에 RM-12042는 내심 자신의 경고가 통했다고 믿었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방해꾼들이 주춤하는 모습을 당연히 자신의 위협에 굴복한 반응이라 판단했고 또한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턱을 쳐들어 의기양양하게 그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들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은 그 착각에 더욱 기름을 부었다.
그러나 RM-12042는 곧 그 시선들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고 정확히는 자신의 눈높이보다 머리 한 개 정도 위의 높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언가 크게 어긋났음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어쩐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 위로 이질적인 압력이 내려앉았다.
두개골 전체를 감싸 쥐는 듯한 그리고 곧 중력이 갑자기 없어진 것처럼 RM-12042는 자신의 몸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바닥과 멀어지자 그는 허공을 차며 버둥거렸다.
"으악, 씨발! 뭐야!"
RM-12042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손을 향해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쇠 파이프 끝이 손목에 정통으로 부딪히며 둔탁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지만 그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 한 치의 미동조차 없었고 머리통을 쥔 손과 그 손의 주인인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마치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시선은 RM-12042에게 향해 있지도 않았다.
손목에 내리쳐지는 충격을 뒤로 한 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시선은 가장 뒤쪽의 MB-05559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고 그 눈길에 닿은 그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MB-05559는 뒤쪽의 통로를 돌아보더니 판단이 끝나기 무섭게 그쪽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 결정은 MB-05559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만큼 빠르고 머뭇거림이 없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그 움직임에 기계처럼 반응했다.
몸이 MB-05559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고 짧고 낮은 달음질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발바닥이 바닥을 박차는 간격은 일정했으며 불필요한 동작은 일체 배제되어 있었다.
시선은 이미 MB-05559의 도주로를 가늠하고 있었고 자세와 각도까지 순식간에 계산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걸음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종아리 근육은 한계까지 수축되었다.
굵고 조밀한 근섬유가 겹겹이 웅축되며 축적된 힘이 팽팽하게 장딴지에 실렸고 다음 순간, 그 힘은 더 이상 억제되지 않은 채 탄성에 가까운 폭발로 전환되었다.
지면이 꺼질 듯한 반동과 함께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포물선을 그리며 MB-05559에게 날아든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손아귀에는 아직도 RM-12042의 머리통이 들린 채였다.
붙잡힌 몸체는 그대로 도구처럼 휘둘러졌고 도망치던 MB-05559를 향해 망설임 없이 내리꽂혔다.
둔중한 충돌과 함께 바닥이 갈라졌다.
충돌 지점에서 지면이 부서지고 파편과 함께 MB-05559와 RM-12042였던 잔해들이 사방에 핏빛으로 튀어 올랐다.
"어… 크헙…!"
충돌의 여진이 가라앉기도 전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곁에 서 있던 또 다른 죄수를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주먹을 내질렀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쏘아진 일격은 AY-20202를 그대로 벽에 처박히게 만들었고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벽체가 갈라지며 그의 형체는 산산이 분쇄되었다.
이어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천천히 몸을 세웠다.
급할 이유가 없다는 듯 한 치의 느슨함도 없이 무게 중심을 발바닥 아래로 깊게 가라앉히고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리자 바로 뒤에 서 있던 HO-88281은 그제야 퇴로가 막혔음을 깨달았다.
그는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공포가 이성적인 판단을 밀어냈고 HO-88281은 달아나는 쪽에 퇴로가 있든 없든 그저 살기 위해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한 죄수의 바로 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생은 거기서 끝났다.
어느샌가 상공에서 낙하하듯 날아든 발레리아 헬스트롬이 손날을 수직으로 곧게 세운 채 그대로 내리쳤다.
팔은 공기를 가르며 쏟아졌고 손날은 정확히 HO-88281의 정수리를 따라 그어졌다.
비명조차 나올 틈이 없었고 몸통은 그대로 양옆으로 갈라져 붉은 핏물과 내장을 그가 달아나려던 방향으로 토해냈다.
이제 일대에 살아남아 서 있는 죄수는 LM-06827뿐이었다.
"하하…"
쪼개진 육편 앞에서 뜨겁게 식어가는 선혈에 흠뻑 젖은 LM-06827은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짧은 실소를 흘렸다.
혼란인지 체념인지 모를 그 웃음에 한순간,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그 모든 잔해의 한복판에서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피투성이의 걸음을 꺾지 않은 채 오직 마지막 생존자를 향해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내딛는 걸음마다 바닥의 피웅덩이가 파도처럼 퍼졌고 죽음이 자신의 최후를 위해 다가오고 있었지만 LM-06827은 그것을 명확히 인지하면서도 감히 물러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윽!"
그러나 그때,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머리를 꿰뚫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덮쳐왔다.
시야가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흐려졌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벽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서둘러 마무리를 짓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정면의 LM-06827은 그 눈빛에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두통이 다시 한 번 더 강하게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큭…!"
짧은 신음과 함께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꿇려졌다.
힘이 빠진 하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그녀는 벽에 손을 댄 채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미끄러지듯 손바닥이 벽면을 긁으며 내려오는 동안, 눈앞은 점점 어두워졌고 멀어지는 소리와 물상들은 심해로 가라앉듯 꺼져갔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의식은 그렇게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천천히 잠들어 갔다.
¹ : Project Luciphelle
² : Bolmor
³ : Abyss Cell Zero
⁴ : NEMETHEX
⁵ : Drop Pod
⁶ : Slow Breather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