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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통로는 서서히 넓어졌다.
벽과 바닥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고 천정의 조명은 여전히 제멋대로 깜빡였지만 공간은 분명 넓어졌으며 공기에는 이전보다 더 탁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오래된 고기들이 채 씻어지지 못해 썩어가는 냄새와 무언가 타들어가는 냄새.
누군가 찢어진 옷가지들과 폐자재를 쑤셔 넣고 불을 붙였는지 드럼통의 불꽃은 크지 않았지만 일정한 박자로 일렁이며 주위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선 소리 없이 걸어오는 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시선들이 있었다.
불빛은 넓은 공동 전체를 환히 밝히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나 그 곁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죄수들의 그림자를 더 없이 부풀리기에는 충분히 밝았다.
곧 각기 다른 체격을 지닌 그림자 셋은 벽 쪽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중 하나가 입안에서 묵은 침을 거칠게 뱉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스플릿 스마일즈¹의 광대 새끼… 갈 길 가시지. 여기가 전부 니들 구역은 아니라고."

GA-11420의 말투에는 경계보다 조롱이 묻어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선을 넘지 않는 소심한 시도였다.
다른 하나는 위험 요소를 확인하듯 찬찬히 LM-06827의 무장을 훑었다.
그리고 판단이 섰는지 허리춤에서 예리한 폴딩 나이프를 꺼내 들어 그것이 막 펼쳐지는 소리와 함께 칼날의 자리를 잡는 순간, PH-00024의 시선은 LM-06827의 뒤쪽 어딘가로 향했다.

"…!"

감당할 수 없는 재해를 마주한 것처럼 PH-00024의 동공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손에 든 폴딩 나이프가 아주 미세하게 아래로 내려갔고 그가 이 공간에서 느끼는 안전의 밀도가 낮아졌음을 증명하듯 경계의 음성은 낮게 울렸다.

"뭐야, 저 괴물은…"

PH-00024의 바로 옆에 서 있던 AR-55666은 즉각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의 시선이 뒤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형상에 꽂히자 쇠 망치를 쥐고 있던 손아귀는 저도 모르게 힘을 더욱 깊게 실었다.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선명히 드러났고 쇠 망치는 조금 전보다 더 불안 속에서 본능적으로 움켜쥔 호신부처럼 그의 손에 감겨들었다.
그러나 발레리아 헬스트롬이 완전히 공동 안으로 들어섰을 때, 드럼통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도 환히 드러냈다.
거대한 덩치와 비정상적인 근육의 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는 어딘가 두려움의 색이 깃들어 있었다.
그 표정에서 그들은 짐승의 사나움보다는 사냥감의 불안을 포식자의 분노보다는 피식자의 당혹을 먼저 읽었다.
그 순간, GA-11420은 고개를 살짝 쳐들어 허를 찌르듯 말했다.

"과연, 광대 새끼가 혼자 기어다니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군. 근데…"

GA-11420은 불빛 너머로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한 번 더 훑었다.
과도한 근육질로 둘러싸인 육체의 벽에 부자연스럽게 얹혀 있는 표정 사이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감지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질적으로 덧칠된 듯한 육체에 부정할 수 없이 도드라진 여성으로서의 곡선과 움츠림을 보자 그의 입꼬리는 크게 올라갔다.

"지켜줄 애인을 좀… 잘 못 고른 거 아닌가."

그 말에 AR-55666와 PH-00024는 마치 참았던 웃음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웃어젖혔다.
지금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억눌러 두었던 경계와 긴장을 전부 갈라진 웃음 틈새로 흘려보내는 것처럼 그 웃음들에는 기세가 실렸고 기세에는 이제 확신이 묻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침묵 속 위협의 농도는 그들이 웃음을 터뜨린 순간에 저편으로 물러났고 그 공백을 대신 비웃음의 열기가 메웠다.
다시 GA-11420이 입을 벌리자 검게 부식된 이빨 사이로 감탄을 섞은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허, 꼴에 여자네?"

AR-55666은 다시 크게 웃었고 PH-00024는 눈가에 맺힌 물기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그 조롱에 살을 붙였다.

"덩치는 씨발 야수인데… 가슴이랑 얼굴은 여자야!"

이제 그의 시선은 대놓고 그 안에 음욕을 담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흉부를 훑으며 여전히 움츠리고 있는 거대한 여체를 따라 굼뜨게 흘렀다.
그러나 PH-00024는 겉으로 자신의 본성을 감추지 않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비스 셀 제로²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본성조차 생존의 수단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광대 새끼, 네 애인을 이쪽으로 보내봐. 저 무지막지한 몸뚱이가 얼마나 여자인지 확인 좀 해보자고."

이것은 일부러 발레리아 헬스트롬이 잘 들을 수 있도록 내뱉은 도발이었다.
표적의 반응을 떠보는 탐색이었고 동시에 한편으로는 숨길 수 없는 본성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PH-00024는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던 그는 흉악한 거체를 지닌 채로도 LM-06827의 등 뒤에 그 음영 속으로 은근히 자리를 잡으려는 그녀의 연약함을 귀신같이 포착한 것이었다.
그녀가 딱히 숨으려 애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노골적인 언사에 대한 무의식적인 방어의 태세였으나 하이에나의 언어는 오히려 그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찰나에 셋의 시선이 조용히 교차했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말없이 서로의 표정을 확인한 뒤, 고개를 한 번씩 확신에 찬 듯이 끄덕였다.
죄수들의 암묵은 셋 중 누구랄 것도 없이 언제든 사냥을 시작하자는 신호였다.
그러나 명랑한 목소리가 막 떨어지려는 그들의 선공을 가로막았다.
LM-06827은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앞에서 고개만 살짝 돌린 채 웃으며 말했다.

"여왕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슬슬 느낌이 오시겠죠?"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그 안의 담긴 의미는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 이제 슬슬… 여왕님께서 다시 한번 보여주실 시간입니다."

그는 뒷짐을 지고 한 걸음 몸을 옆으로 옮겼다.
그러자 LM-06827에게 가려져 있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몸이 조명 아래로 다시금 선명히 강대한 근육선과 정제된 힘을 그들 앞에 명확하게 펼쳐냈다.
드럼통의 불빛이 그녀의 몸 줄기를 타고 흐르며 윤기를 발하는 그 순간에 세 죄수의 움직임은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단지 그뿐이었으나 하이에나들에게 옮겨간 기세를 반전시키는 것에는 충분했다.
이어 틀어진 기류에 불을 지피듯 LM-06827은 무대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라도 되는 양 두 팔을 펼쳐 혼란 속에 서 있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한껏 과장된 동작으로 과시했다.

"이분을 보십시오! 비천한 당신들과 다른 고귀한 분이십니다! 육신은 강철로 주조되었고, 심장은 전장에서 고동쳤으며…"

그는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에는 압도적인 중성자별의 중력이 함께하고, 눈빛 하나로 구역 하나쯤은 묵념에 잠깁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향한 수식은 점점 길어졌고 행동은 점점 무대 위의 연사처럼 변해갔다.

"이 어두운 지옥의 끝에서, 최초의 광휘를 휘두를 분! 쇳덩이 같은 짐승들조차 눈도 못 마주칠 지옥의 여왕! 도살자와 여러 괴물들이 뒤섞인 이 수렁 속에서, 진짜 짐승이 누군지를 처음으로 증명해 주실 분!"

소개를 대강 마치었는지 LM-06827은 조용히 양손을 모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당신들은 지금…"

죄수들을 또렷이 직시하던 그의 말은 잠시 멈췄고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분 앞에서… 감히… 감히! 고개를 쳐들고! 눈을 치켜뜬 채! 애인이니, 여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였지요?"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나는 감히 명합니다."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고 기이하게 찢어진 미소는 다시 귀 끝까지 걸렸다.

"당장 이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심장을 꺼내 바치십시오!"

그는 고개를 앞으로 기울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것이 바로 여왕께 합당한 예의입니다."

LM-06827의 연극적인 선언이 잔향처럼 공동을 맴도는 사이로 그의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가 무거이 가라앉은 공기를 맑게 울렸다.

"저기…"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마치 자신의 거대한 손이 무언가 큰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속삭였다.

"왜 저를 자꾸… 자꾸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녀의 항의에 분노는 없었다.
다만 정말로 이해를 하지 못한 이가 느낀 특유의 당혹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LM-06827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야 진짜, 여왕님이시니까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은 연거푸 돌아왔다.

"다만 본인이 아직, 기억을 못 하실 뿐이죠."

그녀가 보기에 그는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LM-06827은 진심으로 자신을 여왕처럼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로 규정하여 그의 광기 어린 진지함 속에서 자신만의 우상을 빚어 그것을 굳게 숭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건한 맹신에 도저히 농담이라 치부할 수 없는 그 확신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말문이 막힌 채 LM-06827의 등을 바라보며 가슴 어딘가에서 천천히 몸을 식혀가는 두려움과 알 수 없는 열기를 동시에 느꼈다.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떤 사건에 의해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타인의 신념이 이토록 광신적인 찬사를 쏟아낸다는 진실이 또한 그것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옥죄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격랑 아래서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입으로 흘러나온 것은 결국 회피의 속삭임이었다.

"저희는 그냥… 지나가고 싶어요."

거대한 몸을 두르고 있는 근육질은 누구보다 완강했건만 지금 그 틈 사이로 새어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전장에서 무기를 먼저 내려놓는 패잔병의 그것과도 같았다.

"저희는, 누구랑 싸우고 싶지도 않고…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이런 말들이 반드시 누군가에게 협상의 언어로써 받아들여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LM-06827은 탄식하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어 정해진 수순처럼 그 찰나의 정적을 깨듯 죄수들의 조롱이 비집고 들어왔다.

"하하, 씨발. 광대 새끼, 괜히 쫄았네. 개수작은 이제 그만두시지."

AR-55666은 침을 바닥에 내뱉고 입안에서 조롱을 길게 뽑아냈다.

"다들 쫄지 마. 표정 봐봐. 완전 애새끼잖아. 저 정도 덩치인데도 몇 대 쥐어패면, 말은 존나 잘 들을 것 같은데!"

GA-11420은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끝을 쏘아붙였다.

"됐어, 저 광대 새끼는 내가 맡지. 어차피 말만 번지르르한 스마일즈의 말단 새끼는 별로 푸닥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 빨리 처리하고 볼일 보자고."

PH-00024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며 드럼통 불빛 너머로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그런 다음에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듯 손짓했다.

"어이, 덩치 큰 아가씨. 광대 새끼 뒤에 숨지 말고 나와 보지 그래? 얘기 좀 하자고."

말투는 능글맞았지만 그 안에는 노골적인 위협이 섞여 있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그것을 느끼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말을 잘 들으면… 내장은 꺼내지 않을게."

그의 말투는 대화가 아니라 사냥감의 기세를 꺾기 위한 일방적인 조율에 가까웠다.
기세는 다시 하이에나들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의 끝자락에는 이제 행동으로 옮겨질 폭력이 맴돌기 시작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입가와는 달리 GA-11420의 눈빛은 완전히 싸늘히 식은 채 LM-06827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그 시선을 통해 이제부터 욕망의 성취를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의사를 무언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분명한 동작으로 허리춤에 감겨있던 바이크 체인을 천천히 풀어낸 뒤, 곧이어 그것을 바닥에 거칠게 내리쳤다.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공동 안에 얇게 깔린 침묵을 단숨에 박살냈고 그 소리 위로 그는 느긋하게 옆을 둘러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목줄은 채워야 되겠지만 말이야. 자, 누가 먼저 들어갈지 순서나 정하…"

그러나 문장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극도로 위험한 기색을 담은 목소리가 GA-11420의 말을 끊었다.

"선택의 고민을 덜어드리죠."

언제부터 손에 쥐어져 있었는지 얇고 반짝이는 칼들을 LM-06827은 팔을 튕기듯 휘둘러 날려보냈다.

"씨발…!"

가늘고 예리한 죽음들이 빛을 머금고 날아오자 죄수들은 반사적으로 외마디 비명을 내뱉으며 몸을 비틀었다.

"…미친!"

그 군상들에 LM-06827은 귀가 찢어질 것처럼 광소했고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리며 어느샌가 다시 빼든 칼과 함께 쏜살같이 앞으로 몸을 던졌다.

"끼이하하하하하! 여왕님 앞에서 무례한 관객들은 조기 퇴장입니다!"

그리고 몸을 날리는 순간, 그는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 자신의 등 뒤에 여전히 황망결에 벌어진 사태에 얼어붙은 듯 서있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향해 외쳤다.

"여왕님께 나머지 관객을 넘겨드렸습니다! 이따가 살아계시다면, 멋지게 박수를 처 드립죠! 끼이하하!"

그런 뒤, 곧장 자신을 지목했던 GA-11420을 노리며 날아들었고 광기 어린 웃음과 함께 순식간에 자신과 상대를 전투의 화염 속으로 끌어들였다.

¹ : Split Smiles
² : Abyss Cell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