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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진 눈으로 공동 한복판의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기를 앞세운 LM-06827의 칼끝과 GA-11420의 바이크 체인이 부딪혀 만든 마찰음은 점차 그녀의 등골을 오삭케했고 주먹 안에 스며든 땀이 그녀의 손바닥을 미끄럽게 적셨다.
게다가 이미 그녀를 향한 더 뚜렷한 위협은 다른 방향에서 더 가까운 곳에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PH-00024는 폴딩 나이프를 한 손에 든 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사선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우측의 사각을 노렸다.
그 반대편에서는 AR-55666이 쇠 망치를 어깨 위에 걸친 채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자세로 조용히 대각선을 따라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두 죄수는 말없이 서로의 위치를 의식하며 합을 맞추었고 작은 퇴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양면으로 동선을 조였다.

"…"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드럼통의 불빛이 죄수들의 어깨 너머로 느릿하게 일렁이며 그녀의 동공을 물들였고 PH-00024의 폴딩 나이프가 그 불빛 아래서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치명적인 칼끝으로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동선을 정조준하며 낮게 속삭였다.

"발 빼려 하지 마. 어디로 도망칠 건데, 거인 아가씨."

뒤이어 AR-55666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낮게 말했다.

"구석에 몰린 짐승… 재밌겠는데? 후려패는 재미가 있겠어."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의 동선을 물고 늘어지듯 눈앞에서 교차하는 폴딩 나이프와 쇠 망치의 포위망 앞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또 한 걸음 물러섰다.
공동의 어둠이 슬며시 자신을 끌어안고 등 뒤의 공기에서 갑작스럽게 서늘한 느낌이 일자 그녀는 벽까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별다른 수 없이 천천히 좁혀지는 반경 속에서 마침내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발뒤꿈치가 구석의 벽면에 닿았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사실이 뒤꿈치를 타고 몸 전체로 스며들었고 단단한 벽체의 감촉은 도망치고 싶은 잔인한 현실로 그녀를 다시금 밀어붙였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그 현실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양손을 앞으로 내젓듯 흔들었다.
그리고 그 몸짓으로 저항도 항복도 아닌 다만 더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단호하게 애절하게 간청하며 애원조의 목소리를 위태롭게 쏟아냈다.

"이러지 말아요… 싸우고 싶지 않아요… 제발…"

문장의 끝자락이 두려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낮게 떨어졌고 그 감정에 절망이 보태져 그것들은 곧장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몸으로 번졌다.
결국 그녀의 거대한 몸뚱이는 조용히 가라앉아 무릎이 바닥에 닿았고 그녀의 눈물 한 줄기도 그 찰나에 동공의 빛을 반사하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마주하며 PH-00024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웃기네. 그 몸뚱이로 이 지랄을 하네."

피와 죽음이 배어 있는 이 생존의 현장에서 눈앞의 거대한 야수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고 그저 무릎을 꿇은 채 굴복의 의사를 눈물로 전달하는 광경에 AR-55666 역시 어깨 위로 올려놓은 쇠 망치를 느슨하게 고쳐 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생각보다 더 고분고분한데? 후드려 팬 고기 맛은 안 봐도 되겠는걸?"

하지만 그 장면을 곁눈질로 훑던 또 다른 인물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LM-06827은 GA-11420의 바이크 체인을 능숙하게 쳐내며 칼끝을 교차시키던 와중에도 시야 한켠으로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망막에 순간적으로 구석에 움츠린 그녀의 형상이 맺혔고 그는 고개를 좌우로 작게 흔들며 혀를 찼다.

"이야… 정말이지…"

날아오는 쇳소리를 피해 몸을 비틀며 그는 슬며시 혀끝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어진 공격을 다시 막아내던 순간, LM-06827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허공을 향해 혼잣말처럼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하!"

마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그 짧은 감탄은 분명히 엉겹결에 떠올린 창의적인 영감의 편린에 맞닿은 기획자의 그것과 같았다.

"이크…!"

LM-06827은 연속으로 날아드는 쇠사슬의 궤적을 칼날로 가볍게 흘려보내면서도 여전히 구석에 침전해 있는 발레리아 헬스트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마치 다른 세계에 유리되어 있는 존재인 것 마냥 한쪽 시야로 상대의 공격을 읽고 다른 시야로 무대 전체의 정서를 조율하고 있었다.
그 흐름 속에서 그는 칼끝에 작은 장난기를 실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리 없었던 GA-11420은 조급함에 못 이겨 회심의 기세로 쇠사슬을 거세게 휘둘렀다.
휘둘러진 쇠사슬이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맹렬히 날아들었고 LM-06827은 그 허점 투성이의 공세를 일부러 받아주듯 칼끝을 튕겨 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작은 실로 매끄러웠다.
그는 손목을 한 번 휘저어 상대의 의도대로 칼과 사슬이 자연스럽게 엉키게 만들었고 쇠와 쇠가 감겨드는 마찰음이 귀를 스치자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부드럽게 기울였다.
휘둘러진 바이크 체인의 궤적에 맞춰 LM-06827은 몸을 기울인 채 타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공동 전체를 뒤흔드는 단말마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강타한 바이크 체인을 따라 파공성이 뒤늦게 쫓아왔고 LM-06827은 그 자리에서 과장된 동작으로 몸을 젖히며 나자빠졌다.
그러자 일순, 공동의 공기조차 멈춘 듯 불꽃 너머의 그림자들이 그 소리들에 방향을 틀었다.

"…"

가장 먼저 입을 튼 것은 AR-55666이었다.

"허… 저쪽은 벌써 끝났는데."

PH-00024도 같은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거참… 뒤질 때도 요란하게 뒤지네, 광대 새끼."

말투는 비웃음과도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안도가 섞여 있었고 그들의 어깨에서는 긴장이 빠지는 기색이 역력했다.
쇠 망치는 느슨하게 바닥으로 내려지며 바닥을 긁었고 폴딩 나이프는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 돌다가 자연스럽게 손잡이로 접혀 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GA-11420은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확실한 타격의 손맛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경계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칼과 사슬이 엉키는 순간에 LM-06827이 이번에도 당연히 가볍게 피해낼 것이라 생각하여 즉각 다음 동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는 이상하리만큼 허무하게 쓰러졌다.
LM-06827이 기이하게 옆으로 나자빠지며 비명을 온몸으로 쏟아낸 그 순간의 그 찰나의 혼란스러운 감각은 아직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불쾌함처럼 GA-11420의 본능을 간질여대고 있었다.

"…뭐야, 저 새끼…"

미동 없는 광대를 한동안 주시하고 있던 그는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PH-00024와 AR-55666의 시선을 받자 이내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아직 의심은 남아 있었지만 차츰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비운 위기감은 은근한 우월감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굳이 숨기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들어 비웃듯 말했다.

"별거 없네. 니들은 아직도 못 끝냈냐?"

하지만 그 말이 만들어낸 파문은 다른 이에게 더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공동 구석에 움츠린 채 떨고 있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시선이 비명의 진원지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LM-06827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귓전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크게 끊어졌다.

"…그만!"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그녀의 들숨을 뚫고 터져 나옴과 동시에 거대한 육체도 함께 솟구쳤다.
주저앉은 채였던 그녀의 전신이 마치 공포의 사슬을 끊고 날아오르듯 팽팽하게 반동을 일으켰고 이에 그녀의 주행로를 가로막고 있던 PH-00024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대로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양팔은 그의 가슴팍을 향해 뻗어졌다.
순간적인 돌진과 함께 그녀는 PH-00024의 중심을 거세게 밀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뭔, 씨…!"

경악성이 터지기도 전에 균형을 잃은 PH-00024는 볼썽사납게 뒤로 나자빠졌다.
그럼에도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쏟아지는 무언가가 그녀를 달리게 했고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돌진은 LM-06827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이어졌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짓이기듯 밀쳐낼 기세로 거칠게 무릎을 구르며 달려온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그대로 LM-06827의 곁에 주저앉았다.
쓰러진 그의 몸 아래로 손을 넣어 상반신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고 두 팔로 조심스레 그의 어깨와 등을 받쳤다.

"괜찮아요? 많이 다쳤어요? 정신… 정신 좀 차려봐요…!"

숨이 끊어질 듯 다급한 속삭임은 이내 울먹임으로 번졌고 그 울먹임은 마침내 억누르지 못할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죽지 말아요… 제발… 죽지 마요…!"

눈물이 쏟아져 피로 얼룩진 LM-06827의 뺨을 적셨고 그녀는 그의 몸을 감싸 안은 채 통곡하듯 울었다.
그 울음은 더 이상 거대한 괴물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도 작고 너무도 여린 너무도 인간적인 절규였다.
하지만 그 광경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PH-00024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어이없네. 덩치는 산만한 게…"

그리고 그는 더없이 냉혹해진 눈빛으로 이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 의미를 곧바로 눈치챈 GA-11420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목덜미 너머로 다가가며 팔을 뒤로 젖혔고 다음 순간, 바이크 체인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갈랐다.

"…!"

차가운 금속이 목을 감싸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빠르게 휘감긴 바이크 체인은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듯 쥐어짜며 그대로 뒤로 잡아끌었다.

"크읏…!"

목울대에 닿은 사슬의 압박이 기도까지 파고들며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호흡이 거칠게 끊겼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몸이 휘청거리자 안고 있던 LM-06827의 몸이 무력하게 땅에 떨어졌다.
숨이 막히는 공포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바이크 체인에 손을 뻗었으나 그것은 저항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더욱 감겨들어 그녀를 뒤로 질질 끌어당겼다.
그리고 바이크 체인을 손에 쥔 GA-11420의 눈빛은 더없이 여유로웠다.
이미 숨통에 이빨을 박아 넣은 포식자의 시선처럼 사냥감의 최후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그는 미소를 더 길게 찢으며 바이크 체인을 자신의 방향으로 더 깊숙이 끌었다.

"사랑극은 거기까지."

곧 자신의 의도대로 사냥감의 다리가 바닥을 허둥대며 미끄러지자 GA-11420의 입꼬리가 더욱 깊게 말려 올라갔다.
굳게 다문 치아 사이로 간헐적인 헐떡임만이 새어나오며 그녀가 간신히 호흡을 이어갈 때, 톱니처럼 날이 선 빈정거림이 칼날처럼 덧입혀져 발레리아 헬스트롬에게 쏟아졌다.

"야수년… 아니지, 아까 뭐라 했더라?"

GA-11420은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떠올리는 척하더니 코웃음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아, 맞다. 여왕이라 했지? 그럼 벌써…"

말끝과 함께 바이크 체인은 더욱 거칠게 당겨지며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호흡을 다시 한번 짓눌렸고 무자비한 한마디가 더해졌다.

"퇴위식의 시간이군."

그 말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곧 이어질 잔혹한 운명을 예고하는 야만의 선고였다.
불빛 아래에서 드러난 그의 이빨은 비열한 웃음만큼이나 누구보다도 야만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눈동자는 여전히 LM-06827을 향하고 있었다.
숨은 얕고 불안정하게 들쑥거리며 허리를 뒤로 젖힌 채 끌려가는 순간에도 손끝은 그를 향한 미련처럼 허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끊겼다.

"…!"

쇠가 뼈를 짓이기는 둔탁한 충격음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PH-00024가 AR-55666의 손에서 빼앗듯 받아든 묵직한 쇠 망치가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옆통수를 정확히 찍어냈고 그 한 방에 그녀의 세계가 기울었다.
순간, 귀 안쪽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둔중한 이명들이 솟구쳐올랐고 현실의 소리들은 모두 인지의 저편으로 흘러갔다.
머릿속에선 절대 잊혀지지 않을 소름 돋는 파육음과 뼈를 짓이기는 충격의 잔향이 맴돌았고 눈앞에선 물상들이 흐릿하게 번지며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을 온몸으로 퍼뜨렸다.
그렇게 거대한 육체는 더 이상 중심을 지탱하지 못하고 앞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굴부터 쓰러져 공동의 거친 바닥 위로 처박히듯 엎어졌다.

"…"

먼지가 잦아든 뒤, 드럼통의 불빛이 한동안 정적 속에서 타는 소리만을 남긴 채 고요히 출렁거렸다.
PH-00024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내려다봤다.
그는 곧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코끝을 찡그리며 쇠 망치를 다시 AR-55666에게 건넸고 천천히 발끝으로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쳇…"

그러다 다시 발끝으로 그녀의 턱을 한 번 쓱 들어 올렸다.
눈꺼풀은 반쯤 감긴 채 풀려 있었고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PH-00024는 혀를 차며 낮게 말했다.

"…기절했네. 하긴, 겉보기에만 괴물이지. 누구든 망치 한 방만 제대로 꽂으면 가는 거잖아."

그의 말에 AR-55666은 웃음을 흘리며 투덜이듯 덧붙였다.

"진짜 짐승은 껍데기뿐이었네. 그래도 너무 한 거 아니야?"

PH-00024는 방금 전까지의 사태를 떠올리며 무심히 가슴팍을 문질렀다.
자신이 밀쳐졌을 때에 느꼈던 그 육중한 압력이 아직도 장심에 선명히 남아 있었고 그것으로 여전히 심사가 뒤틀려있던 그는 쓰러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몸을 신경질스럽게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씨발, 진짜. 무슨 야수가 달려드는 줄 알았어. 이래 봬도 성깔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조련하기는 빡세겠어."

뒤이어 바이크 체인과 쇠사슬을 손에 말아쥐고 있던 GA-11420이 코웃음을 쳤다.

"뭐, 덩치값은 하는 모양이네. 근데, 지금은 숨넘어가기 직전이잖아…"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바닥에 쓰러진 형상들로 시선을 옮겼다.

"일 치르기엔 딱 좋은 타이밍이지. 몇 년 만에 여자냐, 시작하자고!"

GA-11420은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어 고꾸라져 있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육체를 뒤집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흐리멍덩했고 바이크 체인에 감기었던 목덜미의 붉은 상흔은 여전히 선명했다.
거대한 여체는 그저 천장을 향해 드러누운 채 얇은 호흡만을 희미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죽진 않았네."

PH-00024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앞에 조심스럽게 주저앉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걸터앉은 두 죄수는 서로 눈빛을 나눈 뒤, 마치 사냥을 마친 포식자들이 사체를 앞에 두고 고기를 어느 부위부터 음미할지 고민하듯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자리에 무게를 실었다.
그들은 우선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신체 반응을 살피듯 아주 느리게 접촉했다.
허리 선을 스치고 손을 얹었다가 떼어냈다.
유방과 사타구니를 따라 조심스럽게 더듬는 손길에도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미동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시선은 허공을 향해 멈춰 있었고 호흡조차 일정했다.
그 부동의 상태에 죄수들의 행동은 눈에 띄게 대담해졌다.
혹시 모를 경계조차 완전히 풀렸고 말투도 느슨해졌다.

"아까 보니… 성정은 잘만 다루면, 꽤 순해지겠더라."

GA-11420은 고개를 기울이며 마치 이미 결론을 낸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몸은 이래도 말이야. 겁만 먹이면 쪼그라들잖아. 다들 무서워만 하니까, 어비스 셀 제로¹ 어딘가에 짱박혀 있다가… 더 이상 혼자 버티기 힘들었겠지."

그 말을 받으며 PH-00024는 코웃음을 쳤다.

"이런 몸뚱이로 잘도 숨어 다녔겠군. 떨어진지 얼마 안 된 거겠지. 운도 지지리도 없는 년."

한편, LM-06827의 몸을 멀찍이 끌고 가던 AR-55666이 다급하게 외쳤다.

"광대 새끼는 내가 확실히 담굴테니, 그년 아직 죽이지마라."

그 말이 떨어진 뒤, 분위기는 완전히 기울었다.
손길들은 점차 제어 불가능한 욕망을 드러내며 그 대담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내 배꼽을 스치던 PH-00024의 혀가 막 사타구니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을 때, 드디어 그녀가 첫 반응을 보였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이 마치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떠오르듯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다 만졌어?"

그 순간, 그녀의 오른쪽에 있던 GA-11420은 자신의 얼굴에 무언가가 박히며 두개골이 뽑혀 나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각을 온전히 인식하기도 전에 그의 몸은 벽 쪽으로 날아갔다.
GA-11420의 몸은 벽에 처참히 처박혔고 연달아 파편이 쏟아지는 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다시 고개를 숙여 PH-00024를 바라봤다.
그녀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묻고 있던 그는 머리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눈만 치켜뜬 채 굳어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저 공허하게 쏟아지는 그 눈빛에 제 발이 저린 PH-00024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머리를 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양쪽 허벅지가 피할 틈 없이 단단하게 닫혔다.
무릎과 허벅지 전체가 하나의 곰덫처럼 맞물리며 그의 두개골을 짓눌렀다.
마치 양쪽의 벽체가 붕괴하여 압사하는 느낌 속에서 PH-00024는 숨이 끊어질 듯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아!"

사력을 다한 비명이 입안에서 겨우 터져 나온 직후, 섬뜩한 파열음이 공동을 메웠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수박이 터질 때와 같은 둔탁한 소리가 살아있던 인간의 육체에서 흘러나왔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 깜빡할 새에 벌어진 참상 앞에서 AR-55666은 한순간 얼어붙었다.
눈앞에서 동료들의 두개골이 산산이 으깨지는 파열음이 그가 들고 있는 쇠 망치처럼 그의 청각을 내리쳤고 그의 눈동자는 그 자리에서 멎은 채 크게 부릅떠졌다.
심장이 가파르게 요동쳤고 질식할 것 같은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살아야 한다는 본능 앞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다시 붙잡았다.
공포와 생존에 대한 갈망이 뒤섞인 채 그는 허둥지둥 쇠 망치를 머리 위까지 치켜들었다.

"머… 멈춰! 다가오지마!"

AR-55666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쇠 망치를 내려놓는 순간에 다음 차례는 자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손잡이를 쥔 손마디는 피가 통하지 않는 듯 하얗게 질렸고 쇠 망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 이 광대 새끼… 죽여버린다! 거기서 한 발짝만 움직이면, 내려칠 거야!"

그러나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오른발을 한 걸음 내딛였다.
그 작은 동작 하나에 AR-55666의 숨은 목구멍에서 걸려 절로 입이 절로 벌어졌다.
차마 말은 더 이상 뱉어지지 못했고 그저 떨리는 눈빛으로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의 본능적인 애원이 그 눈빛에 서려 있었건만 그녀는 그 시선을 무심히 흘기다가 느리게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 미소에 AR-55666은 마치 공간 전체가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고 입은 엉성한 협박이라도 다시 내뱉으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뱉지 못한 채 허탈한 웃음만을 남겼다.

"하하…"

곧 AR-55666은 자신의 명치에 무언가 깊숙이 파고드는 감각을 느꼈다.

"…!"

언제 그렇게 빠르게 다가와 걷어찼는지도 모를 속도였다.
복부 깊숙히 파고든 그녀의 왼쪽 발에 허리는 앞으로 꺾였고 숨은 거꾸로 빨려 들어가며 그는 그녀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손에 쥐고 있던 쇠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은 자세로 날아간 AR-55666의 몸은 팽개쳐지듯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닥을 몇 번이나 튕겨 굴렀고 그러고 나서야 그의 몸은 겨우 멈춰 섰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AR-55666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다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주인이 걷어차인 반동으로 공중에 튕겨 올라갔던 쇠 망치를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빠르게 낚아채어 그대로 내리꽂았다.
내리꽂히듯 떨어진 쇠 망치는 다름 아닌 LM-06827의 얼굴 바로 앞에 코끝이 닿는 지점에서 정확히 멈춰 세워졌다.
바닥에 먼지가 일 만큼의 힘을 실었지만 끝내 닿지 않은 타격.
그 후에 이어진 목소리는 약간의 분노와 담담함 속에 묘한 압력을 실은 명령이었다.

"야, 광대. 기절한 척하지 말고 일어나."

그러나 LM-06827은 묵묵부답이었다.
여전히 그는 숨을 멈춘 시체처럼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말없이 손목을 살짝 꺾었다.
쇠 망치의 끝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더니 LM-06827의 코끝을 가볍게 건드렸다.

"안 일어나면, 이대로 죽인다."

그제야 LM-06827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의 정적을 깨며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재빠르게 움직여 주변 상황을 훑었고 이내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하하… 여왕님."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면쩍게 웃음을 흘렸다.

"장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가볍게 흘려보내기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뒤였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봤다.
묵묵히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은 무언가 담겨 있었지만 끝내 말은 없었다.
대신 조용히 몸을 돌려 손에 쥐고 있던 쇠 망치를 멀리 내던졌다.
벽을 맞고 튕겨나간 망치는 바닥을 몇 번 굴렀고 마침내 공동의 한쪽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LM-06827을 돌아 본 그녀의 시선에는 더 이상 장난을 받아줄 여유 따윈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넌 뭐야. 그리고 여긴 대체 어디지?"

무거운 침묵 속에서 떨어진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하게 얽힌 분노와 의문이 짙게 배어 있었다.

"분명 어비스 셀 제로에 떨어졌고…"

그녀는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말끝마다 어딘가 날이 서 있었지만 단어들은 무형의 실처럼 얽혀들며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의 편린들을 선명하게 끌어올렸다.

"잡스러운 버러지들… 죄다 뭉개버린 기억은 나. 그러고 나서… 널… 죽이려 했는데…"

단편적인 회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LM-06827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완연히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눈만 움직여 주변을 한차례 훑은 뒤, 분노를 속으로 가라앉힌 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정신 차려보니까 또 다른 곳이야. 환경이 계속 바뀌고 있어. 그리고 그때마다 버러지들이 계속 내 몸을 더듬고 있고…"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음영이 LM-06827에게 짙게 드리워졌고 고개를 기울이는 동작에는 마치 적당한 답변이 없을 경우 그의 머리통에서 직접 진실을 도려내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빠른 설명이 필요해."

하지만 숨 돌릴 틈 없이 쏟아지는 냉정한 명령과 시시각각 지나치는 죽음의 감각 앞에서 LM-06827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LM-06827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깨를 으쓱이고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기지개를 늘였다.
기지개를 켜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의 입꼬리는 가볍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글쎄요…"

LM-06827은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저만 알고 있는 여왕님의 비밀이 있긴 한데…"

그는 옷깃을 털고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걸 순순히 말해버리면, 재미없을 것 같지 않나요?"

예상외의 답변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의도를 담아 그에게 다가서며 짧게 되물었다.

"뭐?"

그러나 손이 뻗어지기도 전에 갑작스레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퍼졌다.
마치 드릴 날이 두개골 안을 가르며 파고드는 듯한 전조 없는 고통에 시야가 일그러지고 호흡이 어긋났다.

"…큭!"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무릎 하나를 바닥에 꿇렸다.

"이런… 제길…!"

거칠게 복식 호흡을 하며 세게 내뱉어진 욕설은 한계에 가까워진 의식의 비명처럼 공동의 바닥으로 흩어졌다.
이전에도 겪었던 의식 단절의 전조는 이미 한 번 느껴봤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었다.
맥박이 귓가를 울리고 인지의 경계가 다시 아득해짐을 느끼며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이 고통이 단순한 육체의 부상이 아니라 마치 어떤 인위적인 간섭에 의해 자신을 강제로 이 몸에서 도려내려는 불가항력인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

정신 깊은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붙잡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여왕의 모습을 LM-06827은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몸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가늘게 뜬 눈동자에는 조소와 연민 그리고 흥미가 뒤엉켜 있었고 그는 이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장난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평탄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특별히 말씀드리죠. 어차피 저희 구역에 오시면… 지금의 여왕님은 당분간 뵙기 어려우실 것 같으니까요."

LM-06827은 무언가 감추고 있던 장막을 슬며시 들추듯 조용히 말을 이으며 동시에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 너머로 방금까지의 익살은 싸늘하게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어떤 불길한 여운이 대신 채웠다.

"여왕님은 두 분이 계십니다. 물론…"

광대의 입술이 말끝을 흐리자 침묵이 짧게 맺히고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시선은 그의 발끝으로 내려앉았다.
끊어진 문장의 뒷부분은 무언가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그녀에게 단순한 농담 이상의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한 분이시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동공이 눈에 띄게 커졌다.

"…뭐? 설마…!"

LM-06827의 얼굴에 다시 익숙한 웃음이 번졌다.

"오호, 눈치채신 것 같군요! 역시 여왕의 권좌에 걸맞는 건, 지금의 여왕님이 더…"

그러나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LM-06827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큭!"

또다시 머릿속에서 통증이 솟구쳤고 사고의 연결이 붕괴하며 기억의 경계가 뒤섞였다.
서로 다른 호흡이 한 몸 안에서 부딪혔고 이를 악문 채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손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거의 독백처럼 내뱉었다.

"인격이… 나뉘다니…"

LM-06827은 그 고통의 한가운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치 애처롭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옆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안심하고 주무시죠. 이제 곧 나타나실… 연약한 여왕님은 제가 잘 보필해 드릴 테니까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소리도 색도 고통도 모두가 하나씩 꺼져가며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세계는 차가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¹ : Abyss Cell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