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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이 감각의 모서리까지 차오른 채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의식이 완전히 질식된 이래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주 작고 가느다란 내면의 심층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대신 사고는 조용히 물속을 헤엄치듯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그녀의 코는 생존을 위해 검댕처럼 탁한 공기를 억지로 들이켰고 그 안에 들어찬 오래된 피비린내가 폐포에 미세한 자국을 남겼다.
구역질이 터질 듯 올라왔지만 몸은 아직 반응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어나야 해…'

내면의 소리가 두 번째로 울려 퍼졌을 때,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보았다.
마침내 억지로 일깨운 시야 너머로 흐물거리듯 뒤틀린 형상들이 보였다.
바닥과 천장의 경계는 왜곡된 채 떠다니고 있었다.
색은 번져 있었고 물상들은 서로를 침범한 채 겹쳐져 있었다.
여전히 위와 아래의 구분조차 확실하지 않았건만 그녀는 그저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돌아온 것은 온점이었다.
피부라 부르기에는 아직 불분명한 어떤 경계면 위로 온도의 차이가 스며들었다.
손길에 닿은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감각은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것들을 온전한 하나의 감각으로 엮어내는 기능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듯했다.
다만 다시 감각이 분명해지며 흔들림이 느껴졌다.
규칙적이지 않은 진동은 팔에서 어깨를 타고 올라와 그녀의 몸을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끌리는 감각이었다.
발목 언저리에서 전해지는 압력과 바닥에서 날개뼈와 등이 스치는 쓰라린 마찰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그제야 자신이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꿈틀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곧바로 제지당했다.
누군가가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고 생각보다 단단한 힘이었다.

"…저기요."

목소리는 떨렸고 간신히 소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어 조금 더 힘을 준 채 말했다.

"다리 좀 놔주세요… 저 깨어났어요."

그 말이 떨어진 뒤, 통로에는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다.
우선 끌리는 감각이 멎었다.
그러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손아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거기에서 강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놓아주지도 않고 있었다.
마치 상대가 판단을 유보한 채 그 상태로 멈춰 선 것처럼 정적은 불필요하게 길게 늘어졌다.
공기마저 숨을 죽인 듯 무거워졌고 그녀는 그 침묵이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발목을 붙잡고 있던 손가락들이 동시에 풀렸다.
발꿈치가 아래로 떨어졌고 묵직한 낙음이 비좁은 통로를 타고 크게 울렸다.
생각보다도 훨씬 큰 소리였다.
자신의 무게가 낸 소리라는 사실을 인식한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츠리며 몸을 더 웅크렸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소리가 이렇게까지 크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소리가 너무도 명백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큼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은 수치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에 밀려 금세 사라졌다.

"오, 일어나셨군요. 여왕님."

묘하게 여유가 섞인 목소리는 공손했지만 마치 이제야 짐을 내려놓았다는 듯 숨김없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LM-06827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손목이 뻐근한지 관절을 풀 듯 천천히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꽤… 무거우셨습니다."

그 말은 불평도 조롱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듯 담담했다.
그래서 더 또렷하게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귀에 박혔다.
방금 전에 발꿈치가 바닥을 찍어 만든 둔중한 소리가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중이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LM-06827의 말은 낮고 차분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단어 하나가 또렷하게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인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가 안전이라는 단어를 곱씹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짧은 사고의 흐름 이후, 관찰은 뒤늦게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고개가 돌아갔다.
긁히고 갈라진 바닥과 말라붙은 혈흔들.
깨진 벽체와 물이 새는 천정.
안전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너무도 거리가 먼 풍경들이었다.
그리고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시선은 이제 외부가 아닌 그 자신에게로 향했다.
팔과 손.
가슴과 허벅지.
그 모든 이질적이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흉악스러운 신체들이 자신의 것이라고는 한 박자 늦게 인식되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동공이 커졌다.
단순히 커졌다는 표현로는 부족했고 시야가 확장되듯 벌어져 그 안으로 지금의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 다음에 비명이 터졌다.

"꺄아아악!"

비명은 높게 좁은 통로를 메아리로 날카롭게 긁으며 튕겨 나갔다.

"여, 여긴… 여긴 대체 어디에요!"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숨이 가빠졌고 떨리는 목울대는 말을 제멋대로 쏟아냈다.

"왜… 왜… 왜! 이렇게 커요…! 제 몸이 왜 이렇죠? 왜 이렇게 커요!"

그녀는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붙잡힌 것은 팔이 아니라 지나치게 두껍고 견고한 근육의 덩어리였다.
손가락이 파묻히지조차 않는 그 단단함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공포는 더욱 깊어졌다.
이번엔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다시 원초적인 붉은 색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이건 뭐에요…! 이게 다 뭐에요?"

이미 말라붙었거나 혹은 아직 젖어 있는 것이 뒤섞인 그것들은 자신의 피부 위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질식시켰다.

"싫어! 무서워…!"

완연한 울음이 섞였다.
거대한 몸이 흐느낌에 흔들릴 때마다 통로의 공기도 같이 낮게 울었고 그 울림은 그녀의 공포심을 더욱 배가시켰다.
LM-06827은 그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혀로 입술을 한 번 적셨다.

"이거 참…"

그 짧은 말에는 마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가늠하는 난처함과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그는 찬찬히 울먹이며 떨고 있는 눈망울과 그 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육체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그러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근차근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일단은 여긴 안전합니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요."

나름 위로랍시고 꺼낸 말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불안정하게 쌓여가던 그녀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켜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LM-06827의 말이 머릿속에서 되뇌어지자 안전이라는 단어와는 끝내 화해하지 못할 풍경들을 바라보며 떨리는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이요?"

거대한 육체의 감옥 안에 갇힌 연약함이 영문 모를 상황들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너무도 선명하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럼… 그 다음은요?"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물음에 LM-06827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침묵했다.
그는 고개를 아주 갸웃거리더니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턱 아래에서 손가락이 몇 번이나 오갔고 그 사이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몸짓이었다.

"음…"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반복하던 그는 단어 하나를 꺼내는 데에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는 눈을 여기저기 굴리다가 다시 그녀에게 촛점을 맞췄다.

"그 다음이라는 게… 어디까지를 말씀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당장 죽지는 않으십니다."

위로보다는 정리된 현실을 보고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리고 이어 그는 희망이 아니라 조건을 덧붙였다.

"적어도 여기서는요."

그 짧은 덧붙임은 통로의 공기를 다시 정적으로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그것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싫어… 싫어요…"

고개가 천천히 저어졌다.
커다란 머리와 굵은 목이 처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온 감정은 지극히 작고 연약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여긴 어디고, 전 왜 이런 몸이고…"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말은 점점 흐트러졌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울음이 섞여 나왔고 문장은 차마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부서졌다.
좁은 통로 안에서 거대한 육체와 작은 내면은 여전히 어긋난 채로 남아 있었고 그 둘의 간격은 위로 몇 마디로는 결코 메워지지 않을 만큼 깊어 보였다.
그러나 LM-06827은 그녀의 울음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눈을 찌푸리지도 손을 얹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울음소리가 통로 안에서 얼마나 크게 울리는지 어디까지 퍼져나갈지 만을 계산하듯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그에게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눈물은 감정이 아니라 다만 변수일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LM-06827은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이 분위기를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한 번 가볍게 털며 말했다.

"자자, 일단은 기운 내시죠!"

위로의 형태를 띠고 있는 억양엔 진심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신호에 가까웠고 LM-06827은 그녀가 자신의 말에 기운을 낼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낼 수 없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집중력을 환기시키는 것에는 충분한 효력을 발휘했다.

"여기가 어딘지부터 말씀드리는 게 빠를 것 같군요."

LM-06827은 통로의 벽을 손등으로 한 번 두드렸다.
금속성의 둔탁한 소리가 짧게 울렸다.

"공식 명칭은 어비스 셀 제로¹입니다. 정확히는 감옥이고 볼모르² 행성 정부가 은하계 전역에서 도의적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것들을 떨어뜨리는 곳이죠."

그의 시선이 잠시 위쪽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천장 너머의 더 위쪽을 마치 우주를 가늠하듯 팔과 손가락을 위쪽으로 뻗었다.

"강간범, 살인자, 불법 신체 개조자, 생체 실험 실패작, 정치적으로 애매해진 군벌들. 죽이기엔 너무도 자비로운 처사고, 풀어두기엔 위험한 것들 말입니다."

위로 올라갔던 손은 아래로 추락하듯 바닥을 향해 빠르게 내리그어졌다.

"여기서는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말 그대로요. 그래서… 여긴 늘 시끄럽고, 늘 피가 흐르고, 늘 안전하지 않습니다."

LM-06827은 다시 그녀를 보았다.

"적어도 일반적인 의미의 안전은 아니죠. 하지만…"

그는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붉어진 눈가, 떨리는 호흡, 거대한 육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겁먹은 표정.
그 전부를 바라보면서도 한치의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여왕님이 계신 한, 이 구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LM-06827은 말을 끊고 천천히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점멸하는 천정의 조명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의 모습은 분절되었다.
그 사이에서 그림자는 제멋대로 늘어났다 줄어들었고 사람의 형상을 흉내 내다 찢어지듯 분해되어 바닥과 벽을 타며 기형적으로 비틀렸다.
LM-06827은 조명이 가장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어느 순간에는 얼굴이 또렷했고 다음 순간에는 윤곽만 남은 채 어둡게 지워졌다.
LM-06827의 미소는 그 안에 있었다.
빛이 들어올 때마다 그의 표정은 분명해졌고 다시 어두워질 때마다 눈과 코의 경계는 흐려지되 입가의 곡선만이 부유하듯 남았다.
점멸은 이제 미소를 숨겼다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LM-06827은 양팔을 옆으로 천천히 벌렸다.
연극적으로 과장된 그 자세는 공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몸짓에 가까워 보였다.
인간적인 표정을 모두 벗어던진 가면처럼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기분이 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웃음은 지나치게 가벼이 흘렀고 말도 지나치게 차분했다.

"여왕님께서는… 여기 기준으로 보면 꽤 좋은 위치에 떨어지셨습니다. 보통은 이 정도 설명을 들을 기회조차 없이 끝나거든요."

그는 자신이 말하는 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덧붙여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 보였다.

"적어도 여왕님은…"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이시니까요."

그의 말은 칭찬도 찬양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나열하는 것과 같은 무게로 떨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도 드리고, 직접 옮겨드린 겁니다."

그는 마치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살아남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하거든요. 그리고 여왕님께서는… 이미 충분한 이유가 있으십니다."

점멸하던 조명이 다시 한 번 깜빡였고 그 순간, 그의 미소는 그림자 속에서 더욱 또렷해 보였다.

"여긴 어비스 셀 제로입니다. 떨어진 자들이 살아남거나, 부서지거나, 아니면… 여왕님께 선택받을 곳이죠."

LM-06827의 말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LM-06827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입술 근처로 방금 문장이 흘러나온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한테… 선택?"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방금 들은 말들을 다시 입 안에서 굴려보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저, 전… 그런 거…"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숨이 한 번 크게 흔들렸고 거대한 흉곽은 공기를 삼켰다가 불규칙하게 내뱉었다.
그 과정에서 목울대가 떨렸고 입안에서 빠져나온 음성은 끝까지 문장의 형식을 유지하지 못한 채 부서졌다.

"그런 거… 싫… 엇!"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고개가 빠르게 저어졌다.
굵은 목과 무거운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 안에 담긴 부정의 의사는 뚜렷해졌지만 미처 자신의 몸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움직임은 여전히 서툴러 보였다.

"전… 전… 저는 제가 왜 감옥에 떨어진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전… 전 나쁜 사람이었나요?"

그것은 진심을 담은 질문이었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어떤 정당화나 기억의 조각도 없이 그저 이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비탄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수렁 속에서 그녀는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눈가는 다시 붉게 물들었고 눈물을 한 번 참아보려는 시도조차 없이 슬픔은 곧바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LM-06827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발치에 떨어진 눈물 자국을 보았다.
그러나 곧 그 시선은 빠르게 벽체의 균열과 핏자국으로 옮겨졌다.

"흠…"

LM-06827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익숙한 퍼즐 조각을 맞추듯 입을 열었다.

"글쎄요, 여왕님."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천히 돌아섰다.

"이곳에 떨어지는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죠."

LM-06827은 손가락을 모두 접어 검지와 중지 두 개만을 펴 내밀었다.

"하나는 이곳에 어울릴 만큼, 더럽고 위험한 쓰레기 종자였거나…"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어진 말 끝에는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또 하나는, 그러한 쓰레기들을 짓밟을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는 갑작스럽게 박수를 친 뒤, 익살스럽게 눈을 흘겼다.

"여왕님처럼 운이 아주, 아주 없었거나요."

그러면서 LM-06827은 그녀의 거대한 손등과 피투성이의 팔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쨌든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그리고, 살아 계시고. 그렇다는 건, 이유 따윈 이미 의미가 없단 얘기죠. 여긴 결과만 중요하거든요."

그 말과 함께 LM-06827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는 깊은 공허와 조소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여왕님이 누굴 잔인하게 죽였고, 무슨 개 같은 짓을 했고, 기억하든 말든…"

냉랭하게 말을 쏘아내던 LM-06827은 갑자기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그건 신경 안 써도 돼요. 어차피, 여긴 그런 걸 따지는 데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의 말에서 전혀 위안을 얻지 못한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흘러내린 주황빛 머리카락은 얼굴을 덮은 채 그 사이에서 낮은 훌쩍임만을 흘려보냈고 LM-06827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턱을 긁었다.
그리고 마치 방금 전의 대화들이 전부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자조하듯 고개를 저었다.

"좋습니다. 울고 계시겠다면 계속 우시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건, 이곳에서 특권에 가깝거든요. 여왕님이 우시는 걸, 감히 저지할 자들은 없을 겁니다."

LM-06827은 두 손을 뒷짐 지고 조용히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하지만 여왕님이 그러시는 동안, 다른 것들도 여왕님의 냄새를 맡겠죠."

말끝에 그는 코끝을 찡그렸다.
마치 그 냄새가 악취라도 된다는 것 마냥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피와 눈물. 이 두 가지는 이곳을 떠도는 하이에나들에겐 정말, 정말 맛있는 애피타이저거든요."

그 말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의 떨림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정지였다.
호흡이 끊긴 것도 몸이 굳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울음의 흐름이 한 박자 늦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변화를 LM-06827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고 재촉하면서도 마치 반응을 즐기듯 말은 태연하게 이어졌다.

"여왕님께서는 밑에서 흐를 액체가 하나 더 있으시잖습니까."

너무도 무례하고 가벼운 경고였다.
그리고 너무도 태연해서 잔인하게 들렸다.
하지만 LM-06827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셋이죠. 이 정도면 애피타이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굳이, 메인 요리까지 갈 필요도 없겠네요."

농담처럼 떨어진 말에 통로의 공기는 한순간에 차갑게 굳었다.
LM-06827은 그 여운을 길게 끌고 가지 않았다.
다시금 감정의 등락을 조율하듯 허리를 살짝 기울인 채 정면에서 발레리아 헬스트롬과 눈을 맞췄다.

"그러니 일단은 방향을 하나로 정합시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들어 올려 그녀의 코끝에 가져다 대고 마치 규율을 어긴 학생을 지도하듯 말했다.

"여왕님이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따위는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요. 지금 당장은… 어디로 가야 덜 찢겨 죽느냐, 이게 중요하죠."

LM-06827은 몸을 세우고 팔을 뻗어 통로 저편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스플릿 스마일즈³, 장담하건대…"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 그의 입꼬리는 기묘하게 뒤틀렸다.

"지금 이 광기 어린 쓰레기통에서… 그나마 저처럼 교양적인 것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LM-06827은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없을 거라는 걸 아는 듯 손을 털듯이 내저었다.

"안 가고 싶으시면, 안 가셔도 돼요. 어차피 여긴 선택이 자유로운 곳이니까."

그는 발을 돌려 통로 너머로 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만 곧… 정말 곧, 다른 것들이 여왕님의 존재를 알아차릴 거에요."

뒷모습에서 던져진 말은 무심했지만 이상하게도 발레리아 헬스트롬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니 우선 움직이죠. 이유는 몰라도 상관없어요. 목표만 있으면 돼요."

LM-06827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명멸하는 빛과 어둠 사이에서 그의 얼굴은 가면처럼 일그러져 있었으나 입꼬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신이 무서워해야 할 건, 자신이 뭘 했는지가 아니라… 지금 뭘 안 하고 있는가입니다, 여왕님."

그리고 그는 빠르게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거대한 그녀의 손에 비한다면 정말 터무니없이 작아 보일 만큼 왜소한 손이었지만 그 손길에는 묘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공감도 친절도 아닌 단지 생존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확신으로 LM-06827은 그 확신을 내민 채 기다렸다.

"제 손을 잡고 일어나세요. 두 발로 걸어가시는 편이 체면도 덜 상하고, 기분도 좀 나아지실 겁니다. 게다가… 무거우시거든요. 많이."

장난처럼 들렸지만 눈빛은 싸늘했다.
그 눈빛에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눈앞의 손은 이 작고 가벼운 손은 이상하리만큼 뿌리치기 어려운 설득력이 있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녀는 천천히 팔을 들어 자신의 손을 그 손에 얹었다.
거대한 손과 왜소한 손이 맞닿는 순간, LM-06827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아귀에 힘을 실어 발레리아 헬스트롬을 가볍게 당기듯 일으켜 세웠다.

"좋습니다."

그녀가 일어서자 그는 손을 놓고 앞장서 담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발레리아 헬스트롬은 뒤늦게 보폭에 맞춰 발을 뗐다.
그녀의 무겁고 둔중한 발소리는 LM-06827의 가벼운 발소리와 겹쳐져 좁고 긴 통로를 천천히 울렸다.
그들의 그림자는 명멸하는 조명 아래에서 길게 늘어졌다.
불완전한 빛은 두 사람의 형체를 분절시켰고 어느 순간에는 괴물과 인간처럼 또 어느 순간에는 인도자와 아이처럼 뒤섞이며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행선지는 스플릿 스마일즈로 말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¹ : Abyss Cell Zero
² : Bolmor
³ : Split Smi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