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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이상한 꿈이었다.
모두가 어둠 속에서 서 있었다.
그들의 피부는 썩어 있었고 칼날을 숨긴 손으로 제 혀를 잘랐다.
잘린 혀는 바닥에 떨어져 피가 고여있던 웅덩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꿈 속이라 그런지 피의 색깔은 흐릿했고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어서 그들은 젖은 손가락으로 서로의 살을 찢었다.
갈비뼈 사이로 서로의 손을 넣어 심장을 꺼냈다.
그들은 검고 축축한 심장을 품에 안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 강마여… 어둠의 주들이여… 우리의 피를 받아 삼키소서…"

그들이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다른 이의 등을 휘어 척추를 부러뜨리고 내장을 끌어냈다.
또 다른 자는 제 눈을 으깨 균열 너머로 던져버렸다.
모든 것이 눅눅한 살점의 마경이었다.
끝없는 악몽처럼 살점의 층계가 만들어지고 무너졌고 다시 세워졌다.
나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건 광대들이었다.
그들은 찢긴 입을 더 벌려 웃고 있었다.

"강마여… 우리의 뼈를 갈아 바치나이다… 너머의 입으로… 우리의 절규를 받아 삼키소서…"

나는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균열을 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 너머에서 무언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살점과 피는 그 목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임하소서… 세 어둠이여… 우리의 내장으로 길을 놓으리니…"

그들은 자신을 제물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것을 신앙이라고 했다.
나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의 끝에는 그들이 너머의 입이라 부르는 무덤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입은 어둠 속에서 언제나 열려 있었다.
모두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꿈 속의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들은 죽고 다시 살아났다.
끝없는 반복이었다.
같은 얼굴.
같은 비명.
언제나 똑같은 고통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희생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였다.
진짜 희생은 끝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칼을 든 손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꿈 속의 나는 그저 보고 있었다.
그저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누구도 죽지 않고 누구도 끝나지 않는 계속되는 위선의 연속을 나는 그것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깨어날 수 없었다.
꿈 속의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꿈은 계속되었다.
여전히 아무도 죽음을 얻지 못했다.
오직 끝없는 잔혹한 연극만이 되풀이되고 있었고 무대의 바깥에서는 이 지옥의 주인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흰 종이들을 하늘에 풀었다.
비처럼 흩뿌려진 창백한 조각들이 피와 살점 위로 내려앉았고 누군가는 그것을 경전처럼 받들었으며 누군가는 성체처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중 하나를 받아든 채 거기에 새겨진 글자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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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덧없는 살점의 수가 찼도다.
혀는 모두 잘렸고, 침묵은 우리의 문이 되었도다.
우리는 열리고, 너희는 닫히며, 문은 너희 안에서 피를 토하리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아니요, 부패한 고기라.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은 있으나 부르지 못하리라.
땅은 너희를 삼키기에 합당하고, 벌레만이 너희를 거룩하다 하리라.
이는 우리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이라.
살아남음이 멸망보다 더한 형벌이 되었나니, 우리는 길이 아니요, 미로며, 진리가 아니요, 궤이며, 생명이 아니요, 종말이라.
우리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빛¹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우리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지 아니하고, 다만 더 깊은 곳에 묻히리라.
우리는 너희가 써온 것을 다시 지우기 위해 왔노라.
기억 위에 썩은 것을 붙이고, 그 부패를 법이라 부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려왔고, 너희는 무릎을 꿇었으며, 이는 오래전부터 기록된 마지막 장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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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침내 거룩한 복음서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주들을 바라보며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내가 이 순간에 이 장막 성역에서 마땅히 토해냈어야 할 문장을 읊었다.

"어둠의 주들이여… 너머의 입으로… 다시는 빛이 스며들지 않게 하소서…"

*    *    *

낡은 석실은 창이 높고 좁아 바깥의 빛이 가늘게만 흘러들어 긴 석탁 옆에 늙은 성기사의 머리카락을 마치 교수대의 밧줄처럼 길게 늘어 보이게 만들었다.
세 명의 제자들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갑주는 아직 새것처럼 반질거려 한 번도 실전을 치르지 못한 것처럼 보였고 무릎 위에 올려진 손들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석탁 위에 펼쳐 둔 두루마리들을 천천히 훑다가 이내 그것들을 치우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창세²의 빛 아래서 어둠을 물리칠 종들아, 너희는 악마³가 무엇이라 배웠느냐."

맨 오른편의 다리온 블랙하트가 곧장 답했다.

"어둠에서 기인한 것들입니다."

뒤이어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가일 카론이 씩씩하게 답했다.

"세 악신을 섬기는 마계의 족속들입니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옆으로 기울였다.

"허나, 너희가 제법 악마에 대해 안다고 자부할 수 있으려면, 그것만으로는 현저히 부족하느니라."

그 말에 석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굳었고 가일 카론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스승님. 신성의 두루마리에는 악마가 세 악신, 네크로시스⁴와 유스칼⁵과 디스가르트⁶의 명을 받을어, 사람의 혼과 살을 탐하는 마계의 흉물들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부족하다고 하신 말씀은, 곧 교리에 적힌 말씀이 그릇되었다는 뜻입니까?"

페르날 에드문드는 손을 든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적혀 있지, 적혀 있어… 물론, 그것이 그릇되었다는 뜻이 아니니라. 얕다는 뜻이니라. 신성의 두루마리는 대개 창세의 복음을 민중에게 널리 퍼뜨리기 위해 적은 것이지, 우리 같은 성기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손끝으로 석탁을 두드렸다.

"우리는 성기사다. 우리는 마귀와 대적하는 교회의 검이니라. 우리는 어둠에서 기인한 것들의 참된 이름을 알고, 마귀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자들이다. 교회는 예로부터 악마들을 혼에 굶주린 짐승들로 여겨 왔나니, 닥치는 대로 혼을 탐하고 모든 육을 빼앗는 것들이라 가르쳤느니라. 그러나 옛 기록들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들의 참된 본질은 결코 그러하지 아니한즉."

그 말에 맨 왼편에 앉은 리파드 헤수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나이가 가장 많았고 성정 또한 차분했다.
성기사로서의 흠이라면 지닌 바 일신의 재능은 탁월했으나 무엇이든 끝까지 진위를 가리려는 마음이 지나쳐 그것이 신앙심에 영향을 주는 제자였다.

"그건… 악마들이 제물 될 자를 가려 덮친다는 뜻입니까?"

페르날 에드문드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로 그러하다."

그 말에 제자들 사이로 당혹감이 번졌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그들의 면면을 훑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수많은 세월에 걸쳐 쌓인 토벌 기록과 순례자들의 증언부터 이단자들의 참회록에 이르기까지 서로 맞대어 살핀 끝에, 교회는 끝내 한 가지 불길한 질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느니라. 그것은 악마가 모든 이에게 똑같은 굶주림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지. 또한 마귀들은 세 악신의 명으로 움직이지도 아닐뿐더러, 저마다 제 몫으로 정해진 혼을 찾아 떠도는 듯하였다."

이번에는 아무도 즉시 되묻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일 카론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정해진 혼이라니요?"

페르날 에드문드는 두루마리 하나를 들어 올려 낡은 필사를 펼쳐 보였다.

"예로부터, 마력⁷의 가호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 불린 이들이 있느니라. 성스러운 교회의 축복도, 오만한 마도사들⁸의 마술도 그들에게는 온전히 스미지 못하였으니, 세상은 그들을 두고 창세의 빛이 머물지 아니하는 자들이라 수군거리곤 하였지."

리파드 헤수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와 다리온은 일전의 순례행에서 그런 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제들이 아무리 치유의 축복을 내려도 아무런 차도가 없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렇다. 너희 둘은 이미 그런 자들을 보았을 것이다. 헌데, 각지의 기록을 모아 보면 놀랍게도, 저주받았다고 여겨지던 바로 그 종자들이 마귀들의 손에서 거듭 비켜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느니라."

그 말에 제자들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문들을 내버려두었다가 한 손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악마가 출현한 변방의 촌락에서는 아이 일곱이 같은 날에 자취를 감추었으되, 유독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이만이 살아 돌아왔지. 어떤 수도원에서는 부정한 이단자들이 불러낸 무저갱의 짐승들에게 모두가 유린당했으되, 줄곧 축복의 성흔을 일으키지 못하던 수습 사제만이 끝내 목숨을 부지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일들이 결코 하나둘에 그치지 아니했다는 데 있나니, 이를 우연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잦았고, 마귀의 변덕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한결같았느니라."

그의 말이 끝나자 가일 카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씀은… 마계의 족속들이 교회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알아보고 지나치신다는 말씀입니까?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질문한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창세의 빛에 머물지 못하는 자들이 지옥의 손아귀에서 비껴난다면, 그러한 이치는 너무…"

가일 카론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석실 안의 모든 이는 미처 이어지지 못한 그의 뒷말을 알고 있었다.

"너무 부당하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어린 제자의 울분을 꿰뚫어 본 사람처럼 차갑게 말했다.

"창세의 빛은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아니하나니, 뜻을 거스르지 말지어다."

그는 빈 두루마리로 손을 옮겨 천천히 숫자를 적었다.
곧 감정을 갈무리한 가일 카론의 눈이 두루마리의 숫자에 박혔다.

"너희는 이 수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느냐."

아무도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때, 다리온 블랙하트가 페르날 에드문드의 물음에 답했다.

"그 여든여덟은 마귀의 상징입니다.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죄업의 갈래를 드러낸 것이라, 아버님께서 제게 일러주셨습니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미소를 지었다.

"블랙하트⁹의 영주께서 자식을 잘 가르치셨도다. 허나 이 불경한 여든여덟의 수는, 다만 상징이라 하여 흘려보내기에는 지나치게 또렷하지. 참으로 지금까지 교회에서 사람에게 빙의한 악귀들을 심문하여 기록한 장막 성역의 수가 모두 여든여덟에 이르렀느니라."

물음에 답했던 다리온 블랙하트가 재차 물었다.

"스승님의 말씀은, 마계가 하나로 이어진 무저갱이 아니고, 마귀들의 무리 또한, 여든여덟에 이른다는 말씀이십니까?"

페르날 에드문드는 마치 그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 우리가 마계라 불러 온 악귀들의 도성은 익히 알려진 것과 달리 하나의 성도를 가진 만마전이 아니니, 저마다 닫힌 결계를 두른 여든여덟의 소굴이라 할 것이니라."

순간, 석실이 조용해졌다.
바깥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으나 누구도 그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무심히 그들의 모습을 훑던 페르날 에드문드는 종소리가 잦아든 틈으로 말을 이었다.

"마치 우리가 악업을 쌓으면, 각자에게 예비된 지옥으로 끌려갈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각자의 지옥에 깃든 그것들 또한 제 소굴과 기원을 함께하는 혼을 알아보고 집요히 뒤쫓는 것인지도 모르느니라. 이러한 일에 아직은 온전한 이름이 붙지 못하였느니라. 그것이 오래된 혈통 때문인지, 아니면… 다만 창세의 뜻인지는 알 수 없도다. 애석하게도 지금껏 누구도 그 숨은 내막까지 밝히진 못하였느니…"

페르날 에드문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석실에 흐르는 식은 공기를 마주하며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므로 마귀들은 단지 사람의 혼과 살을 탐하여 깃드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어떤 매임을 끊고자 이르는 것이니라. 참으로 두려운 것은, 그 불경한 족속들은 놀랍게도 이를 자비라 일컫는다는 점이니라."

가일 카론은 그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놈들이 사람의 영육을 찢고 흩는 것을 자비라 부른다고요?"

페르날 에드문드의 입이 조용히 다물리자 가일 카론은 곧바로 다시 내려앉았지만 얼굴은 이미 흥분으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것을 뒤로하고 페르날 에드문드가 다시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리파드 헤수스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혹 그 매임이란 것은… 장막 성역과 이어진 운명의 결속을 가리키는 말씀이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마력의 가호를 입지 못한 자들이 어찌하여 악마들의 마수에서 벗어나는지 그 까닭 또한 족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잠시 그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그 까닭이 무엇이냐?"

리파드 헤수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마력의 갈래가 여든여덟이라면, 악마들은 그 갈래들 중 저들과 닮은 마력을 지닌 자들을 뒤쫓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마력과 섞이지 못하여 그것을 다루지 못하는 자들은, 도리어 악마의 표적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페르날 에드문드는 옅게 미소 지었다.

"교회가 잠정으로 내린 바가 곧 그러하다."

그는 이어서 천천히 낭독하듯 말했다.

"이제 한 번에 새겨듣거라. 지금까지 이른 바를 모두 거두어 말하자면, 마귀는 모든 혼을 탐하지 않느니, 밝혀진 여든여덟의 도성은 나눠진 소굴이라 여겨지느니라. 각 권역의 마귀들은 제들과 같은 운명의 표식을 품은 혼을 탐하고, 창세의 빛이 머물지 아니하는 자들은 이러한 매임이 너무도 희미한 까닭에, 악마가 먼저 거두고자 드는 혼이 아니니라."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석실에는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침묵 끝에 마침내 가일 카론이 다시 손을 들었다.

"스승님. 그렇다면… 창세의 빛이 머물지 않는 자들은 오히려 화를 면한 자들이라 보면 됩니까?"

페르날 에드문드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가일 카론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듯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석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우리가 무엇보다 경계하여야 할 바가 곧 이것이니라. 교회가 아직 분명한 답을 내려주지 않는 연유도 거기에 있나니."

그는 또렷하게 한 단어씩 끊어 말했다.

"창세의 빛에 머물지 못하는 자들이, 실로 지옥의 눈길에서 벗어난 자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페르날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보다 깊고 두려운 내막이 감춰져있다면, 이는 아직 그들의 혼이 수확의 때에 이르지 못하였거나, 그들이 훗날에 이르면 마귀와 같은 무리에 들 운명이기 때문일 수도 있느니라."

가일 카론은 일전의 망령된 물음에 대한 무례를 만회하고자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들이 유예된 자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너무도 위험한 종자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페르날 에드문드는 그에게 시선을 향하여 망령된 추측을 다시 끊어 세웠다.

"여러 갈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라. 그러므로 교회의 검인 우리는 경솔한 단정을 입에 올려서는 아니 되는도다."

그는 나머지 제자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러한 경솔한 단정에는 두 갈래의 죄가 있다. 하나는 창세의 빛을 가벼이 여기는 오만인즉, 이것은 '교회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마귀가 노리지 않는다'는 식의 망언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니라. 다른 하나는 무고한 이들을 섣불리 저주받은 자로 단정하는 비정이니라. 우리는 겁에 휘둘리는 민중이 아니며, 밝혀지지 않은 거짓을 교리로 꾸리는 자들도 아니다. 우리는 눈앞의 빛에 죄의 사함을 구하고, 드리운 어둠 앞에 검으로 죄를 물을 뿐이니."

페르날 에드문드는 석탁 위의 두루마리들을 정리하며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제, 말해 보아라. 교회의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이지?"

뜻밖의 근원적인 질문에 제자들은 잠시 얼어붙었으나 다리온 블랙하트가 먼저 입을 떼었다.

"이 땅에 드리운 어둠을, 창세의 빛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페르날 에드문드는 분명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도다."

이윽고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창세께서 우리를 비추시되, 진리를 밝히는 빛이 너무 늦게 이르지 않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도 따라 읊었다.

"창세께서 우리를 비추시되, 진리를 밝히는 빛이 너무 늦게 이르지 않게 하소서."

*    *    *

재는 허공을 떠돌았고 무너진 담벼락 틈새로 불꽃은 마치 숨을 쉬듯 애처롭게 일렁였다.
잿빛 하늘 아래 다리온 블랙하트는 무너진 성벽을 붙잡고 떨리는 손으로 가문의 영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의 탄식은 메아리처럼 흩어지며 텅 빈 땅 위로 떨어졌다.
마을 어귀와 아이들이 웃으며 뛰놀던 우물가.
저녁마다 아늑한 불빛이 새어나오던 담장 너머의 모든 것이 무정한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리온 블랙하트는 무너진 성터 앞에 무릎 꿇고 손톱이 부러지도록 잿더미를 헤집었다.
그 안에서 작고 쪼그라든 손 하나를 찾았다.
새까맣게 타버린 너무나 작은 손.
손은 아직도 그가 선물했던 장난감 칼을 힘없이 쥐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 없어…"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참혹한 폐허 앞에서 성기사의 고결했던 영혼이 처참히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다.
그의 울음은 짐승의 포효처럼 메아리가 되어 황폐한 대지를 떠돌았다.
한참을 짐승처럼 울부짖던 다리온 블랙하트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무너진 영혼을 억지로 부여잡고 폐허 곳곳을 절박하게 헤집기 시작했다.
무너진 기둥 아래를 깨어진 돌계단 틈을 주검들에 난 상흔을.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려줄 단서 하나라도 찾으려는 듯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가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보게 되었다.
그을린 성벽 아래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사악한 봉인 하나를.
그것을 확인한 다리온 블랙하트의 눈에 피가 서렸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반쯤 녹아내린 검은 문양은 기이하게 뒤틀린 채 남아 있었고 그것이 불경한 악마의 언어임을 다리온 블랙하트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성채 너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악의 기척이자 이 땅 위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들의 흔적이었다.
다른 이의 육신을 제 허물처럼 뒤집어쓰고 그 안에 깃든 영혼마저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는 저주받은 마계의 족속들.
그 흉물들이 바로 이곳에서 그의 가문을 그의 아이를 그의 영지민들을 하나하나 찢어 그들이 기원한 여든여덟의 무저갱 속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다리온 블랙하트의 심장은 점차 피가 끓는 듯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뼛속 깊이 각인된 신성의 맹세조차 이 끓어오르는 분노 앞에 산산이 녹아내렸다.
그의 두 눈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고 마치 지옥의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그리고 이 모든 절규가 모든 죽음이 불속에 타버린 손 하나가 그를 무너뜨리고 동시에 일으켜 세웠다.

*    *    *

영주성의 불길은 아직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채 숨이 꺼져가는 짐승처럼 가늘게 일렁였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 틈 사이로 여전한 잿빛의 하늘이 보였고 타버린 블랙하트 가문의 휘장은 바람을 스치며 검은 나비처럼 허공을 흩날렸다.
악마는 영주성의 가장 깊은 곳에 폐허로 가려진 그 그늘 속에 앉아 있었다.
다리온 블랙하트는 알현실의 문턱에 멈춰 섰다.
손에 쥔 검은 성채에 잔존해 있던 악마 하수인들의 피와 살점으로 얼룩져 있었고 검게 그을린 갑주의 균열마다 불에 익은 살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살의는 오직 알현실의 악마만을 맹렬히 꿰뚫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사람과 닮아 있었기에 오히려 더 역겨웠다.
검게 그을린 거죽은 타다 남은 양피지처럼 갈라져 있었고 그 틈새마다 피대신 붉은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입은 길게 찢어진 채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두 개의 검은 우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장작이 타고 남은 잿더미 같은 것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네놈이구나. 이 땅에 죽음을 불러온 것이."

다리온 블랙하트의 물음에 악마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마치 너무도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다는 듯 기묘한 표정의 끝에서 그것의 입꼬리는 조금 더 길게 찢어졌다.

"안식을 허락했다."

그 한마디에 검을 쥔 다리온 블랙하트의 손아귀는 힘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닥쳐라!"

울려퍼지는 고함이 알현실 바닥에 흩어진 재와 불길을 흔들었다.
하지만 악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은 설교라도 하듯 느리고 유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본 것은 불길과 죽음뿐이겠지. 찢긴 살과 타버린 뼈. 그래, 그대는… 아니… 우리의 눈은 살아있는 동안엔 그것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니까. 허나, 그대가 죽음 이후의 진실을 안다면, 그대는 우리에게 무릎 꿇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악마의 말에 다리온 블랙하트의 눈에 서린 핏발이 한층 더 짙어졌다.

"감사?"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나의 사람들이, 나의 가족들이! 나의 아이들이! 찢기고 불에 타 죽었다!"

다리온 블랙하트와 악마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알현실 안의 공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불길은 줄어드는데도 열기는 오히려 짙어졌다.
마치 알현실 전체가 그의 진노를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지켜야 했던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되어… 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그의 마지막 말은 걷잡을 수 없는 내면의 분노에서 거의 쥐어짜이듯 흘러나왔다.

"그런데 네놈이… 감히… 감히, 감히! 내게 감사하라는 말이 나오느냐…?"

악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완전히 일어서자 비로소 드러난 것은 인간을 흉내 낸 상체 아래로 이어진 부자연스러운 형상이었다.
그것의 다리는 없었다.
허리 아래로는 마치 검은 연기와 문드러진 손들이 무더기처럼 얽혀 흐릿하고 뒤틀린 형상으로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악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살아남음이 축복이 아니다."

그것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설득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수없이 반복된 어떤 진실을 고하듯 그것은 알현실 안에 가라앉았다.

"숨을 쉴 수 있다 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하여,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예정된 운명은 결코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모든 운명은 우리를 끝없이 살아있게 하는 저 빛의 잔재가 그대와 우리에게 닿는 한, 끝나지 않는 것이다."

다리온 블랙하트의 얼굴은 미세하게 떨렸다.
다만 이는 터져 나오기 직전의 진노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혹은 애초에 개의치 않는 것인지 악마는 앞으로 나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가 그토록 아끼던 이들에게 끝을 선물했다. 불멸의 저주를 모르는 자들은 우리의 자비를 잔혹이라 부르지. 우리는 그대가 아끼던 모든 이들의 그 애처로운 영혼을 덮고, 그들이 본래 갇혀있었어야 할 운명의 감옥¹⁰에 대신 갇힘으로써 안식을 내려 준 것이다. 우리는 자비를 베풀었다. 자비를 베푼 것이다, 성기사여."

그 순간, 다리온 블랙하트의 안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끊어져 내렸다.

"더러운 입으로…"

그것이 창세 앞에 맹세했던 기사도의 마지막 고귀함이었을지 원수에게조차 변명의 여지를 허락했던 마지막 자비였을지 어느 쪽이든 그 뒤에 남은 것은 더 이상 성기사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였다.

"죽어간 이들을 모욕하지 마라!"

그의 검은 그것의 입술이 더 이상의 불경을 토해내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핏빛 분노에 물든 성기사의 거체가 찰나의 순간에 섬광처럼 악마와의 거리를 지워 버렸고 너무도 단호하고 빠르게 행해진 검격은 악마의 목을 어깨 위에서 한 박자 늦게 미끄러뜨렸다.
그것의 목이 끊어진 자리에서 검게 타들어 가는 살갗으로 썩은 잿물이 쏟아졌고 이내 잘려 나간 머리는 알현실의 돌바닥을 나뒹굴었다.
악마의 피를 털어낸 다리온 블랙하트는 아주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에 어린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한때, 맑고 곧았던 눈동자엔 광휘 대신 깊은 분노만이 남았다.
그는 검을 자신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성스러운 맹세를 읊던 성기사의 입술 사이로 이제는 기도가 아니라 증오가 흘러나왔다.

"악마들이여, 나는 너희가 내게서 앗아간 이 모든 것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나는 내 삶의 마지막까지, 블랙하트의 마지막 피가 내 안에서 마르는 그 순간까지, 너희 악의 종자들을 쫓겠다. 맹세하리라! 이 검은 이 땅에 드리운 모든 악과 그 더러운 피를 남김없이 씻어내릴지니, 너희의 그 불경한 진명을 하나하나 검날에 피로 새기며, 그 부정한 살을 모두 불태워 재로 흩날리게 하리라, 이 검은 너희가 믿는 그 허망한 우상을 깨뜨리고, 너희가 본디 기원했던 그 어둠 속으로 너희를 영원토록 추방하리라! 나는 이제 이 검의 뜻을 이루는 대행자요, 너희의 저주받은 불멸을 뜯고 찢어, 그 이름조차 잊힐 망각의 끝으로 너희의 존재를 유배하는 심판자가 되리라!"

잘려나간 악마의 머리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의 표정은 연민으로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그것은 조롱이 아니었으되 너무도 오랫동안 필멸의 증오를 받아들인 끝에 더 이상 아파하지도 못하게 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기이할 만큼의 고요한 비애가 그 불경스러운 안면 위에 떠올라 있었다.

¹ : The Great Radiance
² : Holy Empyrean
³ : Demon
⁴ : Necrosis
⁵ : Yuskal
⁶ : Disgart
⁷ : Nano Machine
⁸ : Magus
⁹ : House Blackheart
¹⁰ : Veiled Sanct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