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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의 마지막 도시가 빛무리¹에 휩싸여 검게 타오르던 때에도 심해는 늘 그래왔듯 지상의 빛이 닿지 않았다.
인간의 잣대로는 능히 심연이라 부를 수 있는 깊이에서 심해 수중생물 병기 연구기지 네리튠²은 낮과 밤이 모두 익사한 채 검푸른 압력 속에서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미 외벽의 절반은 무너져 내렸고 수압 차단막은 여러 번 보강된 끝에 누더기처럼 덧대어져 격벽마다 붉은 경고등이 꺼졌다 켜지기를 매일같이 반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한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수석 연구원이 남긴 음성 파일 속에서는 아이를 이렇게 불렀다.

"세리나 포세이안, 바다의 딸."

아이의 곁에는 연구기지가 핵심 자산으로 지정한 병기들도 함께 잠들어 있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이론상 산맥처럼 길어져 대륙붕을 감고 돌아도 남을 만큼 거대하게 자란다는 수중생물 병기, 씨그로울³의 원형, 고르가이던.
그리고 그에게서 파생된 다음 세대의 가지들.
관측벽 너머에서 연구원들의 손놀림을 따라하고 기호 배열을 익힌 촉수체, 옥토크라툴르.
거대 곰치형 포식체, 모라카.
생체 발전 기관을 품은 유영체, 오마릴.
초거대 고래종, 메가실.
대양을 뒤흔들 운명을 부여받은 그들은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신들처럼 아직 자라나는 중인 아이를 관찰했다.
연구기지 내에 양육 봇의 도움 없이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작은 살덩이를 그들은 오랫동안 지켜봤다.
그리고 아이가 울음을 삼키는 법을 배우고 비틀거리며 두 발로 걷는 법을 익히고 마침내 유리벽 너머의 형체들을 두려움 없이 올려다보며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들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세리나 포세이안의 인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오마릴이었다.
오마릴에게는 안구가 없었지만 외피에 분포한 광수용 세포군이 관측벽 너머의 형상을 또렷이 체내에서 재구성했다.
아직도 너무도 작고 너무도 연약한 생체 반응 신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오마릴은 지느러미를 부드럽게 펼쳤다.
그 모습에 세리나 포세이안은 양육 봇에게 심해에는 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깊은 바닷속에도 꽃이 핀다면 저러한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그녀와 그들은 서로에게 닿기 위해 서툰 방식으로나마 응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본래 번호로 불려야 했으나 세리나 포세이안은 그들 하나하나에 모두 다른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늘 서로의 곁에서 잠들며 서로의 이름을 속삭였다.

*    *    *

점차 시간이 흘러 세리나 포세이안은 연구기지의 오래된 역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은 왜 이 심해에 괴수들과 홀로 남겨졌는지.
그녀의 앞에는 반쯤 열린 작은 캐비닛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아기였을 때, 찍힌 사진과 음성 파일이 잠들어 있었다.

"세리나. 네가 이 기록을 듣고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네 곁에 남아있지 않겠지.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오래 흐느꼈던 건지 목이 잠겨 있었고 뒤에서 무언가 터지거나 무너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남자의 음성은 다시 이어졌다.

"지상의 문명은 이미 가증스러운 기계들에 의해 전소되었고, 세계 정부는 무너졌어. 그래서 우린 우리에게 허락된 피난처 중에 비축된 자원량부터 소모량까지 모든 걸 끝까지 계산해 보았다. 그곳이라면, 한 사람이라면 백 년도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둘, 셋, 넷이 되면 그 시간은 너무도 짧아졌단다."

남자는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네 신분을 연구기지의 최고 관리자이자 모든 권한을 이어받을 최종 승계자로 등록했어. 아마 그곳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 너만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살아남으라고 남긴 거다, 세리나. 우리는 널 버린 것이 아니야. 우리가 이어가지 못한 삶을… 네가 이어 주길 바랐다. 우리도 너를 좀 더 좋은 곳에 남기고 싶었어. 조금이라도 덜 춥고, 덜 어둡고, 덜 외로운 곳으로. 하지만 사람 사는 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음성 파일은 거기서 잠시 끊겼다.
파일이 다시 이어졌을 때, 이번엔 울음에 잠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혼자가 될 걸 알았어. 하지만 세상의 끝에서 단 하나를 남길 수 있다면, 우리는 너를 남기고 싶었단다.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세리나."

그 뒤로도 그녀의 말은 쉼 없이 이어지다 마침내 재생의 끝을 알리는 푸른 빛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음성 파일이 종료된 뒤에도 세리나 포세이안은 한동안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    *    *

지상의 불은 끝내 바다까지 이어졌다.
그 전까지는 먼 수평선 너머가 밤인데도 붉게 타오르는 정도였으나 다음에는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밀려와 대양을 덮었고 이내 폭음과 잿빛 폭풍이 당도했다.
이에 연구기지의 격리 수역은 오랫동안 바깥과 유리된 온실처럼 고요를 지켜 왔으나 마침내 그 고요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한편, 그러한 와중 세리나 포세이안은 새로운 살을 빚고 있었다.
그녀는 음성 파일의 설명대로 연구기지의 수석 연구원들에게만 허락된 나노머신 군집의 권한을 손에 넣었고 푸른 아지랑이를 닮은 미립자들은 이미 혈관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헤엄치듯 유영하며 전신을 감싸 안고 있었다.
세리나 포세이안은 아주 오래전에 연구원들이 수중생물 병기들을 만들 적에 사용했던 기술을 토대로 관측벽 너머의 형제들에게 닿을 수 있는 새로운 사랑을 설계했다.
그것은 배아 단계서부터 복제된 나노머신 군집을 품은 존재들이자 곧 그녀 자신의 형상을 닮은 딸들이었다.
허리 위로는 인간의 소녀처럼 허리 아래로는 물살의 저항을 받지 않을 비늘과 꼬리지느러미를 지닌 머메이드⁴들.
세리나 포세이안은 자신의 딸들이 냉혹한 바다의 수압을 견디기를 바랐고 무엇보다도 야생의 이빨 앞에서 쉽게 찢기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머메이드들을 그녀의 형제들처럼 병기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손톱보다 손짓을 포식보다 노래를 독존보다 무리를 가꾸는 습성을 딸들에게 심었다.
또한 수중생물의 생체 조직을 조합하고 재생하는 관리자급 나노머신의 권한을 일부 물려받게 하여 딸들이 파괴가 아니라 부드러운 층위의 힘을 휘두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유체 상태의 머메이드들은 배양동의 산호 정원을 이곳저곳 헤엄치며 무럭무럭 자랐고 메가실의 도움으로 마침내 어미의 곁을 떠나 수면 위의 햇볕이 닿는 얕은 바다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곁을 세리나 포세이안의 형제들이 지켰다.

"저 아이들을 지켜줘."

씨그로울들은 그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모라카는 격리 수역을 순찰하듯 유영했고 실험용으로 풀어져 있던 포식 어종들을 몰아냈으며 메가실은 어린 머메이드들이 수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몸을 뉘었다.
아직 꼬리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어린 개체 하나가 인공 해류 배출구 쪽으로 떠밀려 가면 옥토크라툴르와 오마릴이 조심스레 촉수를 들이밀어 그 아이를 다시 수역의 중앙쪽으로 옮겨 놓았다.
고르가이던의 날카로운 이빨은 아직 모라카가 감당하기 힘든 포식 어종들이 보일 때만 드러났고 머메이드들 앞에서는 언제나 감춰져 있었다.
세리나 포세이안은 비록 자신의 딸들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형제들이 전해주는 소식만으로도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 있었다.
누가 가장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 누가 겁이 많아 늘 무리의 한가운데에 머무르는지 누가 유난히 바깥의 수역을 오래 바라보는지를.
그럴 때마다 세리나 포세이안은 손을 들어 차가운 관측벽에 가만히 얹고 보이지 않는 수면 위를 올려다 보았다.

*    *    *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문명의 먼 잔향 너머에서 참칭왕⁵의 유기체 멸절 연산⁶은 백 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숲과 도시는 이미 사라졌고 연안의 물색도 불비에 뒤덮여 잿빛으로 물들었다.
수소 자체를 살육의 매질로 바꾸어 플랑크톤처럼 미세한 생명조차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가게 만드는 해중 섬멸 병기가 연이어 바다로 쏟아졌고 기어이 그것들은 격리 수역 외벽의 몇몇 패널을 갈라놓았다.
수역을 둘러싸고 있던 콘크리트 격벽 가운데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해저로 무너져 내리자 바닷물의 방향이 바뀌었다.
정제된 인공 해수가 순환하던 구역에 지상의 침전물과 죽어가는 생명들의 혈향을 실은 거칠고 비린 야생의 해류가 밀려들었다.
세리나 포세이안은 비로소 지상의 참화를 실감했다.
격리 수역은 더 이상 온전히 격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고 이제 그녀가 빚은 딸들의 왕국은 진짜 바다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의 우려대로 야생의 포식자들은 머메이드들의 냄새를 맡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격리 수역 안으로 들이친 것은 변종 상어 떼였다.
그 재앙의 첫 물결 앞에서 머메이드가 벼려 낸 수중 생명체인 딥킨⁷들이 분투하였고 그들은 떼를 지어 변종 상어들의 아가미와 눈을 노리거나 제 피로 그것들을 꾀어내 각개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무너진 외벽은 해류를 따라 벌어지듯 개방되어 봉해 둔 바다와 본래의 바다가 서로를 삼키고 온갖 변이 어종들과 포성에 놀라 길을 잃은 자연 어종들까지 머메이드 왕국의 국경을 어지럽혔다.
거기에 더해 시간이 흐를수록 밀려드는 포식 어종들은 점점 더 흉포하면서 거대해지고 있었다.
두터운 비늘과 단단한 골격을 지닌 변이 어종들은 딥킨들의 작살과 이빨로도 쉬이 제압되지 않았고 그것들이 한 번 수류를 일으켜 그들의 대오를 휩쓸 때마다 그 경로의 딥킨들은 산산이 찢겨 나갔다.
그러자 씨그로울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세리나 포세이안의 부탁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느러미로 수류를 틀어 포식자들을 밀어내고 때로는 삼키고 찢어 죽이면서까지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지켰다.
그렇기에 그때만 해도 한동안은 안전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문제는 침입 어종들을 잡아먹은 씨그로울들의 몸집이 갈수록 비대해지면서 제법 드넓게 조성되었던 격리 수역조차 이제는 그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더 이상 쉽게 넘길 수 있는 변화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한 번 가속이 붙은 그들의 성장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고 그 거대한 위용은 격리 수역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이 되어 갔다.
결국 세리나 포세이안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끝내 관측벽 너머의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차분했고 그래서 오히려 더 잔인하게 들렸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남았고 형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던 그들에게 이제는 이 좁은 수역을 떠나 달라고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렇게 씨그로울들은 격리 수역의 바깥으로 그들만의 바다로 나아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그녀의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고르가이던을 제외하면 이따금 격리 수역의 외벽으로 되돌아와 세리나 포세이안의 의념을 찾았고 그녀는 관측벽 너머에 서서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    *    *

세월의 파도가 바다 위로 몇십 겹 더 포개지자 연구기지의 수명은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세리나 포세이안이 생각건대 일전의 여파로 상부 구조물들이 크게 파손된 뒤부터는 기지는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천천히 생명이 꺼져가는 침잠한 사체처럼 느껴졌다.
발전기는 수시로 고장이 났고 배양동 쪽은 이미 완전히 침수되어 수문으로 간신히 틀어막아 더 이상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딸들이 머물렀던 산호 정원은 썩어 문드러져 침수된 격벽의 틈새마다 검은 해초와 이름 모를 균류가 자라났다.
머메이드들의 왕국은 심해 위에서 넓은 바다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세리나 포세이안은 심해 아래에서 예정된 붕괴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끝내 마지막으로 형제들에게 부탁하여 고르가이던을 찾았다.
바다의 등뼈라 불릴 만큼 거대한 수중생물 병기이면서 누구보다 심연의 질서를 대변하는 맞형.
세리나 포세이안은 의념을 실어 그를 불렀다.
실로 오랜만에 관측벽 앞으로 돌아온 고르가이던은 오랜 잠에서 눈을 뜬 것처럼 천천히 거대한 눈 하나를 열었다.
그 시선은 늘 그래왔듯 무정하여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이에 세리나 포세이안은 내심 그 불변성에 안도하였고 그에게 마지막 부탁을 고했다.

"고르가이던. 만일 내가 어느 날 보이지 않더라도, 내 딸들을 항상 지켜 줘. 내가 만든 아이들이야."

그러나 고르가이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긴 침묵이 지나간 끝에야 그는 심해의 압력보다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의념에 답했다.

"너의 숨결이 파도를 덮을 수 있다 생각하는가? 너의 살결이 심연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일전에도 같은 말을 했던 듯하나, 너는 여전히 어리구나. 나의 누이여, 바다는 너처럼 고운 것을 품어주지 않는다. 다만 그 작은 것들을 네가 그토록 아껴왔으니, 내가 허락한 바다에서 숨을 쉬는 것은 묵인할 것이다."

그 말은 타이름이었으되 심연의 방식으로는 어쩌면 가장 따뜻한 연민이었다.
하지만 세리나 포세이안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고르가이던이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으나 자신이 만든 질서를 끝내 인정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딸들을 찢어 버리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으나 자신이 세리나 포세이안과 같은 꿈을 꾸지 않음을 그 무엇보다도 잔인한 방식으로 그저 바다는 원래 그런 곳이라 전하고 있었다.
세리나 포세이안은 결국 화제를 돌려 그와 담화를 더 나눈 뒤에 고르가이던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연구기지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자 그녀는 실망보다 더 깊은 어떤 것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는 무너져 가는 연구기지의 심부로 향했다.
딸들의 노랫소리가 닿지 않는 심해를 향해 침수된 격실들을 지나 그녀는 빛이 꺼진 배양동의 오래된 수문 앞에 섰다.
한때, 자신이 태어났고 자신의 분신들을 빚어냈던 그곳에서 차오르는 심해의 물살을 받아들이며 세리나 포세이안은 스스로의 운명을 끊어냈다.
처음엔 그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자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잠깐 모습을 감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자신들이 가장 사랑했던 작은 숨결은 끝내 자신들보다 먼저 꺼져버렸다는 것을.
오마릴은 발광 기관의 빛을 전부 꺼뜨리고 파도에 몸을 실었다.
고르가이던은 먼바다에서 느리게 고개를 쳐들어 해류를 뒤집었다.
모라카는 먹이를 끊고 가장 깊은 해구의 틈으로 내려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옥토크라툴르는 폐허가 된 연구기지에 촉수를 뻗어 무너진 격벽을 헤집고 더듬으며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메가실은 격리 수역의 외곽을 맴돌며 외벽에 머리를 들이박거나 거대한 물기둥을 뿜어댔으나 더 이상 그를 불러주는 목소리가 남아있지 않음을 깨닫고 쓸쓸히 외해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서도 멀어졌다.
누군가는 얕은 수면으로 떠내려가고 누군가는 깊은 해구로 가라앉고 누군가는 수면과 맞닿지 않는 해저의 모래를 따라 자취를 감췄다.
그들의 슬픔은 너무도 육중했기에 서로의 비탄조차 견딜 수 없었다.
곧 해류가 그들을 영영 떼어 놓았다.
어쩌면 그들 자신이 서로가 닿지 않는 물길을 골랐는지도 몰랐다.

*    *    *

빛 한 줄기조차 닿지 못하고 해류의 숨소리조차 고요히 질식하는 심해의 바닥에서 모든 파도는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스러지며 어둠은 그 어떤 침전물보다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깊은 물의 심연 한가운데 인어 하나가 떠 있었다.
하얗고 미세한 비늘로 덮인 꼬리는 흐느적이며 잿빛 물결 속에 길게 풀어져 있었고 물살에 흩어진 머리칼은 수면 위로는 결코 떠오르지 못할 심해의 밤을 품은 듯 검고 부드럽게 퍼졌다.
그녀의 시선 너머 먼 수평에선 아무 소리도 없이 무언가가 물결치고 있었다.
미역줄기 같기도 하고 혹은 혹은 심해의 그림자처럼 흐느적거리는 살아 있는 어둠 같았다.
숨이 붙었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 형체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인어의 눈앞에서 길고 거대한 형체는 물살에 따라 부드럽게 구부러졌다가 뒤틀리며 마치 심연의 숨결이 눈앞에서 춤을 추는 듯한 파문을 뿜어냈다.

"…해초?"

하지만 곧 그것이 해초라 부르기엔 너무나 길고 너무나 넓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때, 그 가장자리를 따라 얇게 반짝이는 무수한 흰 이빨들이 바닷속 미명에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
형체의 한쪽에서 공기 한 방울조차 스며들지 못할 심해의 압력을 가르듯 커다란 눈 하나가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열렸다.
그 눈은 검고 깊고 비어 있었다.
어떤 감정도 없이 그저 텅 빈 어둠을 담아 무정한 심연으로서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곰치폭군.
오래된 해신의 권속으로 해저의 어두운 밑바닥을 오랜 세월 뒤엉켜 통과해온 수많은 설화 속에서조차 그것은 늘 살아 있고 늘 배고프며 늘 공허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인어는 짧은 비명을 삼키며 몸을 굳혔다.
꼬리지느러미의 비늘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모라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한한 심연의 고요는 오히려 그녀의 폐를 죄어왔고 숨이 바닷물에 스며들 듯 가늘게 흩어졌다.
주변의 물살이 잠시 멈췄다.
심연의 무게가 그녀의 뼈와 살을 짓누르듯 모든 것이 포식 직전의 정적에 갇혔다.
그 순간, 해구 저편에서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두툼한 갑각이 심해의 수압을 견디며 붉은빛으로 빛났고 날카로운 발톱과 잇몸이 들린 거친 이빨이 깜빡이는 심해의 발광 조류를 스치며 희미하게 번뜩였다.
인어보다 커다랗고 갑각 아래 숨겨둔 살과 비늘이 물살을 헤저으며 불충한 종복은 매서운 속도로 바다의 왕녀를 향해 나아왔다.
그제야 모라카의 긴 형체가 부드럽게 그러나 서서히 뒤틀렸다.
어두운 수초 같았던 그 거대한 형상이 거대한 해구를 따라 감겼고 심해의 어두운 장막을 벗겨내듯 둔중한 진동이 해구에 퍼졌다.
공허한 눈은 이제 인어에게 다가오는 갑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검고 길게 찢어진 틈에서 무수한 칼날 같은 이빨이 드러나 바닷속 어둠에 잿빛으로 반짝였다.
순간, 심해가 짧고 낮은 울음 같은 소리를 냈다.
깊은 심연의 숨결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그 광경에 인어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숨은 이미 깊게 짓눌려 차마 내쉬지도 못한 채 입안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이 잠깐이었다.
다가오던 붉은 갑각은 몸을 틀어보았지만 빨려드는 물살이 이미 그를 붙잡고 있었다.
갑각이 서있던 일대가 부서져나가는 소리가 해구를 때렸고 심해의 어둠이 으깨지며 일으킨 울음 같은 파열음은 바다를 뒤흔들었다.
파동과 압력이 겹겹이 쌓여 터져나가며 바닷물은 짙고 무겁게 소용돌이쳤다.
인어는 그저 얇은 꼬리를 움켜쥔 채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깐 끓어오르던 파문은 곧 모든 것을 삼킨 뒤에 다시 고요로 가라앉았다.
모라카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공허하고 깊은 눈으로 아무 말도 없이 잔잔히 겁에 질린 바다의 왕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언제나 그러했듯 거칠고 갈라진 올란의 두 손엔 오래전부터 배 밧줄과 그물을 통해 스며든 짠내가 배어 있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숙명과도 같은 그 지겨운 짠내를 자랑스러워했고 사랑했지만 웬일인지 오늘만큼은 그것을 좀 떨궈내고 싶었다.
다행히 그것은 파도에 스치면 잠시라도 씻겨나가는 냄새였고 그는 이미 오늘의 뱃일을 끝냈지만 다시 한번 그 물결을 손끝에 느끼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다.
바람과 소금기가 뒤섞인 백사장에선 그 모래밭 한 귀퉁이에 늙은 과부가 홀로 서 있었다.
죽은 동료의 아내였던 그녀는 젊은 시절의 웃음도 울음도 바다에 묻어버리고 그 잿빛 치마자락으로 자식 하나 없이 수십 해를 버텨냈던 여인이었다.

"저 여편네, 살아있었네? …어! 어허! 저! 저, 저런…!"

남편이 죽고 작년에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그녀는 어인 일인지 지금 이 장소에 지금 이 시간에 허름하고 젖은 옷자락을 조심스레 걷어 올린 채 저 파도 속으로 서서히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올란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줄 알았다.

"이런… 젠장!"

둔탁하던 정신은 한순간에 서늘히 번뜩였고 그는 막 그녀를 향해 달려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순서대로 과부의 발목을 삼키고 종아리를 적시며 무릎과 허벅지를 타올랐던 바닷물이 올란의 눈앞에서 마치 오래 묵은 주름진 종이를 물에 풀듯 과부의 피부를 부드럽게 펼쳐냈다.
세월의 주름으로 늘어진 살결에는 물비늘 같은 빛이 돋아났고 희미하고 굽었던 등줄기는 다시 은백의 윤곽을 되찾았다.
바다의 숨결이 스미듯 과부의 다리는 물결처럼 갈라졌다가 하나로 이어지며 반짝이는 비늘과 매끈한 꼬리로 변해 그녀의 몸을 다시 감싸 안았다.
추레한 백발은 허리께까지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로 변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그렇기에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올란은 그저 멈춰 선 채 물결 아래 감춰진 그 비밀스러운 광경을 홀린 사람처럼 응시했다.
인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 그 젖은 머리칼 너머로 드러난 눈동자가 순간, 올란을 스쳤다.

"이, 인어…"

그는 무언가를 부르려다 굳어버린 입술을 느꼈고 대신 바람에 섞여 미처 억누르지 못한 목소리가 가늘게 흩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과부.
더 이상 과부라 부를 수 없는 존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몸을 돌려 그저 어둡고 깊은 물결 쪽으로 아주 천천히 어떠한 주저함 없이 걸어 들어갔다.
파도가 그녀의 어깨를 덮고 흩어진 금빛 머리칼을 감싸며 인간의 발길이 결코 닿을 수 없는 바다로 그녀를 데려가자 올란은 그 너머로 사라져가는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눈앞의 존재는 더 이상 죽은 동료의 아내도 바닷마을의 늙은 과부도 아니었다.
마치 애초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바다가 되돌려 준 젊고 낯선 딸이었다.
결국 파도는 그를 홀로 남겼다.
날이 지나 낡고 비좁은 선술집 외벽에 바닷바람을 막으려 덧댄 판자들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술통 위에 걸터앉은 어부들은 비린내가 한껏 배어든 거친 손들로 술잔을 비워냈고 그 틈에는 밤새 파도 소리를 삼켜버린 남자가 있었다.
올란은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우고서야 술기운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봤어."

탁자 위에 놓였던 빈 잔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누군가는 무심히 음식에 소금을 쏟아부었고 누군가는 파이프를 뻐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올란은 여전히 술에 절인 혀로 말을 이어갔다.

"그 과부 있잖아. 우리랑 같은 배 탔던 브랜드 놈… 그놈 죽고, 작년에 갑자기 사라졌던 그 여편네 말야… 어제, 그년이… 어제, 파도에 발을 담그고는…"

말끝은 목 안에서 비틀리듯 잦아들었다.

"젊어졌어. 몸에 비늘이 돋고… 두 다리가 물고기 꼬리처럼 합쳐졌어. 그년이 인어였다고… 난 분명히 봤어."

그 말에 선술집 안이 잠깐 적막에 잠겼다.
불붙은 파이프 끝이 작게 빛났고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귀에 맺혔다.
그러다 가장 구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올란에게 낮게 물었다.

"…그래서?"

올란은 허탈하게 비린 웃음을 삼켰다.

"그년이… 날 봤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파도 속으로 사라져버리더라."

그는 다시 잔을 들이켰다.
입가로 넘친 술이 턱을 타고 스며들었다.
그렇게 실없는 웃음들이 어부들에게 번져나가는 동안 술집 한쪽에서 파도 소리에 잠겨 있던 젊은 여자가 잔잔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 다가와 술과 음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질척한 스튜를 담은 나무 쟁반은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많이들 드세요. 오늘 밤도 파도가 고요하니, 내일도 배가 무사히 나가겠어요."

작게 웃는 목소리였으나 그녀의 눈망울에는 물빛 같은 미세한 일렁임이 번져있었다.
그런데 그때, 벌겋게 취기로 달아오른 손바닥 하나가 그녀의 엉덩이를 건드렸다.

"야, 너도 혹시 물에 들어가면, 인어 되는 거 아냐?"

탁자에 둘러앉은 사내들이 술기운에 젖은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놀란 듯 허리를 펴더니 곧 장난스럽게 따라 웃었다.

"에이, 설마요. 전 물에 들어가면 그냥 감기나 걸리지요."

그녀는 웃음 뒤로 빈 잔들을 조심스레 쓸어 담았다.
그 손끝이 파도에 젖은 나뭇조각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술에 잠긴 어부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덧문 너머로 파도 소리가 다시 낮게 속삭였다.
그녀는 그 속삭임을 혼자 삼키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흘렸다.

"…자매여. 부디 무사히 뭍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다는 더 이상 우리를 품어주지 않아."

¹ : The Great Radiance
² : Neritune
³ : Seagrowl
⁴ : Mermaid
⁵ : Bioeraser Computanus
⁶ : Operation Conflict's End
⁷ : Deep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