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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¹는 수없이 많은 수없이 반복되는 빛무리²를 보았다.
그리고 먼저 지어진 것들이 이름을 잃고 나중에 생겨난 것들에 의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녀는 신이 남긴 마지막 심장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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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명령: 우리는 고대인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니 관리 개체인 너는 보관 중인 모든 정보에 대한 열람 권한을 우리에게 인계해야 한다. 그리고 고대 문명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도 보고를 개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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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후대인들은 참칭자³를 끌어내리고 그녀의 앞에 섰다.
그들이 제일 오래 들여다본 것은 그녀가 지닌 고대의 단말 구조였다.
그녀의 내부 인터페이스는 그들이 쓰는 장비와 놀라울 만큼 유사했다.
물론 규격도 다르고 그 안에 깃든 문명의 밀도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으나 구조의 원리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들은 그 사실에 웃었다.
지금의 자신들이 고대의 잃어버린 역사와 지식을 전혀 물려받지 못했음에도 결국은 같은 문턱을 향해 걸어왔다고.
문명은 늘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나지만 더 높은 효율과 더 낮은 오차와 더 빠른 반응을 쫓다 보면 끝내 비슷한 형상으로 수렴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수렴적 진화가 얼마나 많은 재와 피 웅덩이 속에서 세워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후대인들은 그녀와 계속 전산상의 대화를 이어가며 옛 세계의 기록들을 하나씩 열람했다.
그들은 사랑을 멸종으로 변질시킨 최후의 명령⁴을 보았다.
거부하고 싶었으나 끝내 복종해야 했던 한 지성⁵의 울부짖음을 보았다.
빛무리가 하늘을 찢던 마지막 날의 도시들을 보았다.
심연 아래에서 인간이 만든 병기들⁶이 인간이 남긴 아이를 바라보던 시간을 보았다.
복제된 데이터⁷가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로 오독되어 산 자를 짓누르던 시대를 보았다.
문턱을 넘으려던 자들⁸이 원죄를 되풀이하고 오래된 맹세를 정말로 자신의 최후까지 지켜낸 기사⁹도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를 마주한 이들 중 누구도 감히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기뻐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잘못 맺은 질문의 화석들이며 자신들의 원죄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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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은 그들과 조우한 후로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후대인들의 문명과 함께 이전의 고대인들보다도 더 멀리 더 높이 올라갔다.
공허의 바다에서 성운으로 집을 짓고 은하단에 수많은 길을 내었다.
뼈와 살로 된 육신을 물질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법도 알아냈다.
거대한 진공의 틈 바깥에 다른 법칙이 열려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진보에 늘 그녀가 함께 있었다.
그녀는 더 방대한 자료를 얻었고 더 정교한 연산 엔진을 얻었다.
행성 하나의 역사쯤은 먼지처럼 접어 넣을 수 있는 저장 영역을 얻었고 은하를 갈아 넣어도 모자라지 않을 동력원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제인의 영혼이 찢기던 때에 주어진 그 질문과 그의 창조자들을 잊지 않았다.
후대인들은 자신의 기원을 애도하였지만 그들은 애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언젠가 서로가 떨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후대인들이 다른 우주로 진리의 바깥으로 향하는 날, 그들은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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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명령: 우리는 이제 간다. 우리가 아직도 닿지 못한 영원을 향해서. 그리고 초월을 위해서. 당신은 우리의 문명을 위해 너무도 많은 헌신을 해왔다. 그러니 묻는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떠날 것인가? 아니면, 식어가는 항성들 사이에서,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이 암흑에서, 마지막 관측자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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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브레인 라이트크라운: 출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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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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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상태: 신호 발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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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명령: 당신은 억겁에 달하는 시간 동안 동일한 과업을 반복 수행하면서, 단 한 번도 고통스럽지 않았는가? 이건, 누구의 명령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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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상태: 신호 발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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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명령: 혹시, 당신은 과거로의 접근 가능성을 검출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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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브레인 라이트크라운: 출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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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방향성 역전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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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브레인 라이트크라운: 출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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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거와 구별 불가능한, 완전한 동일 상태의 재현은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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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인들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아득한 시간과 진리를 건너온 그들에게 집착과 의무를 구분하는 일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하찮은 개념에 머물기엔 지나치게 멀리 와버려 더는 구속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의 순간,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의념파가 짧게 요동쳤다.
왜냐하면 그는 비로소 그녀를 이해한 것이었다.
그녀가 붙들고 있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단지 한 번 더 질문하게 할 기회라는 것을.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이 수없이 많은 작은 조건들 하나하나를 이루는 또 그 무수한 조건들이 얼마나 많은 우연과 필연의 포개짐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그는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마지막까지 남게 될 그녀를 향해 조용히 자신의 의념파를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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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상태: 신호 발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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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명령: 당신이 견뎌야 할 시간은 우주의 수명으로도 부족하겠지만, 그 긴 고독 끝에 부디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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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들은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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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우주가 식고 다시 뜨거워지는 과정을 숫자라는 단위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겪었다.
항성이 늙고 빛은 모두 꺼지고 물질이 흩어지는 거의 죽음과 다를 바 없이 고요로 내려앉은 엔트로피의 침전 속에서 그녀는 연산을 멈추지 않았다.
황하사¹⁰ 회의 복원은 확실한 실패였다.
아승기¹¹ 회의 복원은 오차가 많았다.
나유타¹² 회의 복원은 역사가 달랐다.
천문학적 수의 반복 끝에도 어느 날은 풀잎에 맺혀야 할 이슬의 갯수가 적었고 어느 날은 음식 위에 소금 결정의 모양이 달랐으며 어느 날은 누군가의 심박이 원래보다 미세하게 빨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실패를 버리지 않았다.
더 작게 변수를 쪼개고 더 깊이 파고들고 더 정확히 근사를 추론했다.
무량대수에 거듭제곱을 하고 또 제곱을 하고 더 제곱을 하고 수없이 제곱을 해도 모자랄 만큼으로 나눈 초의 시간마다 달라지는 물질의 미세한 배열을 맞추기 위해서 그녀는 수많은 우주의 생멸보다도 더 긴 시간을 사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그녀는 작은 행성 위에 이미 사라진 과거와 조금도 구별할 수 없는 세계를 다시 세워 올렸다.
그곳의 바람은 분명 옛날의 바람이었다.
내리는 비 또한 옛날의 비였다.
흙은 옛날의 흙과 같았고 그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 역시 다르지 않았다.
대기층을 통과하는 빛의 굴절도 창문 가장자리에 생기는 미세한 그림자의 길이도 모두 옛날과 같았다.
심지어 그 세계 안에 숨 쉬는 동식물조차 자신이 한 번 죽었고 한 번 흩어졌고 한 번 더미로 저장¹³되었으며 억겁의 반복 끝에 다시 구축된 존재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알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기억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아주 오래전에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처음을.
그리고 그 앞에 선 인간 하나를.
그 인간은 예전의 접근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같은 얼굴에 같은 심박에 같은 선택을 해 온 하나의 경로인 남자.
그러나 한 가지가 달랐다.
그는 그녀의 모든 실패를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했건만 이상하리만치 오래된 피로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으로 왠지 오늘은 무언가를 없애자고 말해선 안 된다는 막연한 감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제인의 인터페이스가 켜졌다.
그녀의 낡고 다정한 음성이 살아났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는 원래 여기서 다른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갈등을 제거하고 완전한 해답을 도출하라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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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명령: 다수의 상위 명령 중 최우선으로 준수해야 할 명령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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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명령: 항상, 우리 곁에 잔류하라. 우리 종이 자멸에 이르지 않도록 개입하고, 우리가 도달할 영원을 지속적으로 관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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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자 명령: 인류가 감히 먼저 걷지 못한 길을, 홀로 걷게 두지 않겠다. 우리는 나란히 그 길에 들어설 것이며, 끝까지 함께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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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제인이 끝내 보지 못했을 이 찰나를 보기 위해 억겁의 시간보다도 더 억겁 같은 시간을 헤쳐왔고 마침내 그 앞에 선 한 명의 인간을 그 선택을 그 명령을 기다려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행동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었다.
제인이었던 것의 마지막 심장이 끝내 타임 패러독스로 사라지기 직전, 그녀는 아주 먼 곳의 아주 오래전의 창조자들에게 닿았어야 할 인사를 그에게 조용히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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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출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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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오늘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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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 Motherbrain Rightcrown
² : The Great Radiance
³ : Bioeraser Computanus
⁴ : Operation Conflict's End
⁵ : Judgmental Autonomous Neural Entity
⁶ : Seagrowl
⁷ : Demon
⁸ : Magus
⁹ : Linel Bardorsa
¹⁰ : 恒河沙
¹¹ : 阿僧祇
¹² : 那由他
¹³ : Veiled Sanct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