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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느와르 소설]살왕지로(殺王之路):그 사내가 강호를 살아가는 법-수의동서(守義同逝)
jgkjustcreat 2026. 3. 31. 20:21
밤은 깊었고 사내의 거처는 월광조차 숨을 죽인 듯 적막했다.
사내는 방 한구석에 놓인 목각 인형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투박하게 다듬어진 나무 얼굴은 눈도 코도 없었다.
다만 아무 표정도 없는 그 납작한 면으로 인형 또한 사내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사내는 말없이 단도를 꺼내 인형의 목덜미 아래를 비틀어 갈랐다.
마른 나무가 갈라지며 속이 드러났고 그 안에서 기름을 먹인 첩지 하나가 떨어졌다.
사내는 등잔불 가까이 가져가 첩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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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모청견.
신분: 모가장¹의 장주.
연유: 한때, 백림맹²에서 총외당주³ 직책을 수행하던 인물로 본동의 행사를 누차 방해함.
무공: 예한십삼검⁴을 익혔으며 일신의 무예가 고강함.
방략:
한도⁵를 떠나 세외에 은거하고 있으며 총외당주 시절의 직속 대주들 넷을 호법으로 거두어 상시 거느림.
본동의 살수들이 표적과 생사결의한 의형제, 채의겸을 도모할 터이니 그때를 노려 일을 도모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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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눈은 첩지 끝에 적힌 마지막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사내는 첩지를 불에 가져다 대었다.
불꽃이 종이를 핥아먹고 모청견이라는 이름은 검게 오그라들었다.
* * *
채의겸이 죽은 뒤, 성시에는 누런 삼베 냄새가 가득 번졌다.
평소에 인망이 두텁던 그였기에 곡성은 그치지 않았고 상여를 준비하는 목수들의 손놀림은 바빴다.
사내는 며칠 전부터 이미 황면포⁷에 인부로 숨어들어 있었다.
거친 삼베옷에 향냄새를 묻히고 허리를 굽혀 관을 나르고 상주가 울다 지쳐 쓰러지면 말없이 물동이를 옮겼다.
황면포는 산 자들이 죽은 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예의를 사고파는 곳이었다.
눈물도 향도 삼베도 관도 울음까지도 모두 값이 매겨졌다.
사내는 그런 곳이 싫지 않았다.
사내가 몸담고 있는 살계⁸도 결국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사내는 일을 하면서도 귀를 닫아 두지 않았다.
장사⁹들이 유족과 장지의 행로를 논하고 누가 어디에서 설지 어느 고개에서 상여를 돌릴지 하나하나 맞추는 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내는 들었다.
모청견이 채의겸의 관차¹⁰에서 어느 쪽에 서있을 것인지.
그날 밤, 사내는 홀로 창고에 남아 관차의 바퀴와 축을 오래 살폈다.
아주 조금만 손보면 되었다.
넘어질 듯 말 듯 그러나 반드시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끔.
사내는 못 하나를 뽑고 나뭇결을 따라 얇게 금을 냈다.
들키지 않을 만큼.
적당히 밀면 버티겠지만 무거운 관이 실리고 여러 무게가 뒤엉키는 순간이 오면 반드시 무너질 만큼.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사내는 밤중에 성내의 더러운 물이 모여드는 축축한 암거를 찾았다.
그곳은 이례적으로 걸방¹¹의 문도들과 처마를 맞대고 때때론 그들과 생사까지 함께하는 곳이었다.
그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코를 찌르는 약재와 썩은 오물 냄새가 사내의 코로 섞여 들었다.
세상에서 버려진 것들이 흘러드는 그 추악한 소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사내는 품속의 금자 하나를 내밀어 원하는 것을 말했다.
"당가¹²의 병독¹³ 가운데, 흑시¹⁴에 풀린 것이 있다고 들었다."
하오문¹⁵의 늙은 약재상이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걸 말하는 게냐."
작은 옥병 하나가 철창 너머 석탁 위에 놓였다.
마개는 아직 열지도 않았건만 그것에선 이미 서늘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
사내는 병을 집어 들었다.
* * *
날은 흐렸다.
하늘은 비를 머금은 채 낮게 가라앉았고 곡소리는 물기 섞인 바람을 타고 길게 흩어졌다.
채의겸의 관이 관차에 실렸다.
상주들은 삼베옷을 입은 채 비틀거렸고 상객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모청견은 검은 도포를 걸친 채 관차의 오른편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으나 눈빛만은 차갑고 또렷했다.
그것은 죽은 의형제를 보내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검객의 얼굴이었다.
사내는 인부들 틈에 섞여 걸었다.
아무도 사내의 손끝이 관차의 나무를 다듬고 있던 것을 알지 못했다.
아무도 관차 옆쪽에 심긴 가느다란 침이 장심독¹⁶을 머금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상여의 행렬이 성문을 벗어나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바퀴가 돌부리에 한번 걸렸다.
관차가 크게 뒤틀렸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관차가 기울며 곧장 모청견 쪽으로 넘어갔다.
그 순간, 모청견이 움직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쏟아지는 의형제의 무게를 떠받쳤다.
나무와 쇠가 삐걱대는 소리 사이로 아주 작게 살이 찢기는 소리가 섞였다.
너무도 사소한 상처였다.
피도 거의 나지 않았다.
주변의 상객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관차를 붙들고 상주들이 울부짖으며 뒤엉켰다.
누군가는 목수를 부르라 외쳤고 누군가는 관이 상했다며 기절초풍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사내는 고개를 들어 모청견의 얼굴을 보았다.
모청견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구겨졌다.
허나 그뿐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관차를 붙들었다.
상처 따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였다.
과연 강호의 호걸다웠다.
그러나 사내는 알고 있었다.
그 짧은 찰나면 충분하다는 것을.
장심독은 급하지 않았다.
사람을 해하는 데 있어 그것을 썼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피를 타고 단전으로 세맥으로 천천히 스며들어 가장 깊은 곳에서 장미처럼 피어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눈치재지 못할 것이었다.
의원도 곁의 호위들도 심지어 독화¹⁷를 품은 본인조차도.
다만 때가 되면 너무 늦을 뿐이었다.
너무 늦어 후회조차 선명하게 피어난 독화 아래에 잠길 뿐이었다.
사내는 혼란 속에서 뒤로 물러났다.
목수들이 관차를 손보고 곡소리가 처연히 늘어지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렬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청견은 산 채로 의형제를 떠나보냈다.
그러나 사내의 눈엔 두 형제의 생사결의가 끝까지 함께 가는 듯 보였다.
하나는 이미 관 속에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그 곁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장지로 향하는 상여를 뒤로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사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침명동¹⁸의 살수는 늘 이런 식이었다.
표적의 죽음을 확인하는 법은 숨이 끊기는 모습을 직접 눈에 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자를 남겨 두고 가장 먼저 어둠 속으로 돌아가는 것.
사내의 거처엔 다른 목각 인형이 놓여져 있을 것이었다.
¹ : 毛家莊
² : 白林盟
³ : 總外堂主
⁴ : 銳寒十三劍
⁵ : 汗都
⁶ : 世外
⁷ : 黃面鋪
⁸ : 殺界
⁹ : 葬士
¹⁰ : 棺車
¹¹ : 乞幇
¹² : 唐家
¹³ : 兵毒
¹⁴ : 黑市
¹⁵ : 下汚門
¹⁶ : 薔沁毒
¹⁷ : 毒花
¹⁸ : 沈明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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