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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명동¹에 거처를 옮기기 전에도 사내는 이미 숱한 첩지를 손에 쥐어 왔다.
왕왕 그런 첩지들 가운데에는 손끝에 닿는 순간부터 심상치 않은 기미를 풍기는 것들도 더러 있었다.
그저 종이는 늘 종이건만 어떤 것은 쥐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 든 이름이 얼마나 깊은 피를 부를지 먼저 말해 주곤 했다.
이번의 첩지야말로 정녕 그러한 종류였다.
사내는 첩지 끝에 적힌 불길한 이름을 한참 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종이 위의 먹빛 또한 미세하게 떨렸다.
이내 사내는 등을 곧게 세운 채 첩지를 등잔불 앞으로 가져갔다.
첩지는 구겨진 채 등잔불에 던져 넣어졌고 불꽃이 가늘게 일렁이며 그 위에 새겨진 먹빛을 한 자 한 자 집어삼켰다.

*    *    *

모용가²는 양주³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흑도삼가⁴의 하나답게 담장엔 검게 유약을 칠한 기와가 빈틈없이 얹혀 있었고 문전을 지키는 자들의 눈빛엔 백도⁵의 명문과는 사뭇 다른 저돌적인 패기가 엿보였다.
이 세가의 사람들은 체면보다 무력을 추종했고 무력보다 권세를 숭상하며 그 권세를 지키는 길에 피를 보아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이를 거리끼지 않았다.
사내는 그러한 가풍의 말단으로 숨어들었다.
길은 이미 의뢰인이 먼저 닦아 둔 것이었다.
마침 오공자⁶인 모용현이 직속의 호위대를 증원하던 참이라 의뢰인은 그 틈에 제 심복을 몇몇 끼워 넣었고 사내 역시 그들 틈에 그림자처럼 섞여 들어갔다.
의뢰인과의 첫 독대는 밤에 이루어졌다.
사내가 빙전단⁷의 전각을 몰래 빠져나와 모용찬의 처소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느낀 바는 그곳이 유난하다 싶을 만큼 사치스럽다는 점이었다.
촛대는 금빛으로 번들거렸고 기물들은 백옥을 깎아 만든 것들이었으며 방 안에 감도는 향은 달면서도 짙었다.
한 집안을 뒤엎을 음모를 품은 자의 처소답게 그 안에서 검소한 미덕이란 눈을 씻고도 찾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사내는 이미 이런 권모에 치중하는 부류를 숱하게 보아 왔다.
제 손에 묻은 업을 중히 여기는 자들일수록 으레 제 주변부터 화려하게 꾸미곤 했다.
어둠을 가리기 위해 도리어 빛을 끌어다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위가 요란한 치장으로 번쩍이는 가운데 정작 그 한복판에 앉은 사람은 자못 잠잠하고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사내의 기척이 닿자 비로소 눈을 떴다.

"귀하가 이번에 침명동에서 보내온 사람이로군."

모용찬은 상아로 빚은 의자에 앉은 채 손짓으로 사내에게 착석을 권했다.
그러고는 사내가 자리를 잡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혈옥배⁸에 핏빛에 가까운 붉은 액체를 따랐다.
그것은 세외⁹의 적포도를 독에 봉해 오랫동안 삭힌 술로 잔에 따르면 빛깔이 붉은 이슬처럼 맺힌다 하여 적로항¹⁰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채워진 적로항의 붉은 술빛은 혈옥배의 선연한 빛과 마치 제 짝을 찾은 듯 맞물려 어느 것이 잔의 색이고 어느 것이 술의 빛인지 쉬이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모용찬은 그 달고도 서늘한 적향¹¹을 목울대로 가라앉힌 뒤에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먼저… 본공자가 귀하들의 수고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게 맞는 예의이겠지."

그는 혈옥배를 손끝으로 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귀하들이 본공자를 위해 힘써 준 공을, 이 모용찬은 죽을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이오."

말은 그리하였으나 그의 눈엔 은혜를 입은 감사의 빛이라곤 티끌만큼도 어려 있지 않았다.
모용찬은 혈옥배를 입가에 머금듯 가져갔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녀¹²는 이제 다시는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보이지 못할 처지가 되었고… 장남 또한 무인으로서 생명이 끝났으니… 그 일로 집안 안팎의 가세가 영 이전 같지는 않게 되었소만…"

거기서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잔 안의 적로항은 잔잔히 흔들렸고 모용찬의 눈은 그 일렁임을 좇아 깊게 침잠했다.
상심을 입에 담고 있으되 정작 음성은 짐을 떨쳐낸 후련한 기색이었다.

"모쪼록… 서로 합을 맞췄으면, 마땅히 혼례를 올리고… 백년가약까지, 흉내는 내 보아야 되는 것 아니겠소? 본공자는 원래 중도에 손을 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번에도 귀하들의 손을 빌리려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오."

모용찬은 그 말을 끝맺으며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느리게 울렸다.

"또한, 장부란 때를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 하지 않소. 신명께서도 이 모용찬을 도우시는 듯하니, 마침… 둘째 형님이 근래 제 호위단인 한신단¹³을 물리고, 막내의 빙전단을 거느린 채, 배각산¹⁴으로 수렵에 나설 예정이라 하오."

그는 말없이 사내를 응시하다가 제 손에 쥐인 혈옥배로 다시 시선을 흘렸다.
정적이 감돌았고 그 틈을 메우는 것은 적로항에서 피어오르는 과실향뿐이었다.

"…거기서 모용왕을 도모할 생각이신 듯하구려."

모용찬은 그제야 눈을 들어 사내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미세하게 짙어졌다.

"…바로 그렇소."

모용찬은 혈옥배를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눈앞에서 고깃덩이가 대놓고 살랑이고 있는데, 이를 뜯어먹지 못한다면, 세인들이 모용가의 삼남을 천치라 수군댄들 본공자가 무어라 탓하겠소."

붉은 술빛이 잔벽을 타고 얇게 번지자 그의 눈빛 또한 그와 같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더욱이… 둘째 형님은 근래에 소가주로 유력하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부친께서도 아예 한혈검¹⁵까지 몸소 전수하고 계시니, 본공자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지… 하여, 요즘은 이 적로항으로 적적한 속을 달래고 있소."

끝내 숨기지 못한 조급함에 심사가 뒤틀린 모용찬은 잔을 거칠게 들이켰다.
달고 진한 과실향이 한층 짙게 퍼졌고 낯빛에 떠오른 것은 취기가 아닌 독기였다.

"그래서, 귀하들은… 제 분수도 모른 채 위세를 과시하려 드는 자의 수급을 베어 본공자에게 선물로 줄 용의가 있소?"

그 말 직후에 모용찬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사내의 얼굴을 훑었으나 그 표정에선 어떠한 변화나 동요도 드러나지 않았다.

"대가를 받으면 움직일 뿐이오. 그자가 모용가의 이공자든, 가주이든, 상관없지."

사내의 담담한 대꾸에 모용찬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은 유쾌하다기보다 눈앞의 검이 제 생각보다도 쓰임새가 충분함을 확인한 자의 안도에 가까웠다.

"하하, 듣기 거북하구려. 정정하신 부친을 선친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그분의 자식인 본공자 앞에서 그토록 태연히 내뱉다니… 아무튼, 귀하들이 본공자를 섭섭하게 하지 않으리란 뜻은 잘 알아들었소. 허나, 본공자는 둘째 형님의 목 하나면 족하오."

모용찬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제야 비로소 허례라는 껍질을 벗고 본심을 드러내려는 듯하였다.

"이번 청부의 대금은 선금과 함께 지금 내어 주겠소. 이건, 용하전장¹⁶의 통용 전표 칠십 장이오. 특별히 본공자의 전서구¹⁷를 이용해도 좋으니, 삼공자가 대금을 수납하였고, 일을 곧장 착수할 터라 한치의 소홀함도 없이 받들라 전해 두시오."

사내는 전표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빙전단으로 돌아온 사내는 전각 안에 널브러져 곯아떨어진 무인들의 곁을 조용히 지나갔다.
코 고는 소리가 둔하게 얽혀 있었고 땀내가 식지 않은 방 안엔 연무의 열기가 아직 가라앉지 못한 채 눅진하게 고여 있었다.
사내는 그들에게 짚어 두었던 수혈¹⁸을 손끝으로 천천히 풀어 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용가의 삼공자는 제 육친의 죽음을 입에 올리면서도 손끝 하나 떨지 않았다.
천륜을 끊어 낼 음모를 말하면서도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냉혈인.
사내는 그런 인간들을 더러 보아 왔다.
그들은 늘 한 걸음 앞서 형세를 읽고 한 발짝 더 뒤에 물러설 퇴로를 미리 마련해 두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대개 마지막 한 수는 비슷했다.
제 손에 묻은 피를 말끔히 털어 내기 위해 한때, 제 뜻대로 움직여 주었던 장깃말마저 서슴없이 버리는 것.
모용찬 또한 다르지 않을 터였다.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잠든 무인들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손을 뻗었다.
풀어 두었던 수혈을 하나하나 다시 짚자 코 고는 소리는 이내 전보다 더 무겁고 낮게 가라앉았다.
사내는 더 머무르지 않았다.
적막한 전각을 뒤로한 채 암야의 칠흑 속으로 조용히 몸을 빼냈다.
사내가 숨을 죽이고 다시 모용찬의 기와 위로 스며들었을 때, 앞서와 달리 처소 안의 불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러나 기척까지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에서 숨쉬는 호흡이 둘이었고 목소리 또한 둘이었다.

*    *    *

모용찬은 침상에 걸터앉은 채 손가락 끝으로 무릎 위를 느리게 두드렸다.

"전심. 자네도 알다시피, 침명동에서 온 자가 모용왕의 목을 취하는 데 한 치의 걸림돌도 있어서는 아니 되네."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안에 실린 비정한 뜻만은 추호의 흐림이 없었다.

"예, 도련님. 이번 거사에 빙전단 속에 교묘히 섞여 들어간 암막¹⁹의 살수들과 속하의 수하들이, 이공자를 철저히 고립시킬 것입니다."

확신이 서린 대답에 모용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이 끝난 뒤엔 그자 역시, 배각산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점일세."

혁전심이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의 말씀은… 그자가 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분부이십니까?"

그가 조심스레 되묻자 모용찬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걸렸다.

"그렇네. 그리고 본공자의 신분패와 밀서까지 모조리 거두어 와야 하네. 물론, 그 백정 놈에게 본공자가 쥐여 준 전표들까지 한 장도 남기지 말고 말일세."

그 말은 거사 후에 남겨 둘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혁전심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신중히 물었다.

"…도련님, 살문과의 약조가 적힌 종이라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태워 없애는 편이 더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모용찬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끝으로 품자락을 가볍게 쳐 안에 든 것을 에둘러 드러냈다.

"속하가 우둔하여, 도련님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겠사옵니다."

그러나 혁전심은 삼공자가 제 품자락을 두드린 연유를 미처 짚어내지 못했다.
모용찬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끝을 찼다.

"전심. 자네는 아직도 사람 다루는 법을 덜 배웠군. 약조란 때론 남겨 두었을 때, 더 쓸모가 있을 때도 있는 법이네. 본공자가 자네에게 밀서를 거두라 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지. 침명동은 지난 거래들로 이미 본가와 지나치게 깊이 얽혀 들었어. 해서 본공자라 하여, 이깟 종잇장 몇 장으로 저자들을 어찌하려는 생각은 없다만, 본공자와 저들 사이에 오간 거래들이 아직 이 품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의 선을 넘지 못하게 붙들어 매는 묵계가 된다는 말일세."

거기까지 말한 모용찬은 침상 끝에 걸친 두 다리를 느리게 포개었다.

"허나, 어차피 본공자와 침명동이 맺은 연은 이쯤에서 끊어져야 하네. 장차 대모용가의 가주가 될 본공자가, 살업으로 끼니를 잇는 하류들과 언제까지고 겸상할 순 없는 노릇이지."

모용찬은 혀끝에서 배어 나온 멸시를 구태여 감추려 들지 않았다.

"이번에 본공자가 저들과의 약조를 깨고 대금을 치르지 않는다 한들 감히 본공자에게 따져 물을 수는 없을 테니, 자네는 그저 모용왕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뒤, 그자 또한, 반드시 도모해야 하네."

혁전심의 대답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곧게 뻗어 나왔다.

"예, 도련님. 설령 암막의 살수들과 오공자의 빙전단이 그자를 놓친다 하더라도, 배각산은 삼면이 막힌 사지²⁰이니, 살아나온다 한들 속하의 묵설단²¹이 뒤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모용찬은 흡족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이대로 무탈히 풀리면, 그 뒤의 피비린내는 죄다 막내가 뒤집어쓰게 될 터이니, 본공자에게 불똥이 튈 일도 없을 것이야."

그는 손끝으로 이불 자락을 느리게 쓸어내리며 비웃듯 코웃음을 흘렸다.

"막내는 어려서부터 너무 곱게만 자랐네. 오냐오냐, 귀하게만 컸으니 처신에 모자람이 많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제 손발이어야 할 빙전단을 되레 모용왕에게 내주었으니… 줄을 잘못 섰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혁전심은 입가의 기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낮게 입을 열었다.

"오공자의 어리석음이야 새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도련님께서 형제의 우애로 한 번 일깨워 주신다면, 이번 일이 지난 뒤에 다섯째 도련님도 깨달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모용찬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그때 가서 깨달아 봐야, 너무 늦지 않겠나."

모용찬은 한참 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혁전심을 향해 만족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전심. 자네는 그동안 참으로 잘해 주었네. 본공자가 훗날 가주 위에 오르면, 자네에겐 총관직을 내어… 아니지, 아니야…"

그는 말을 잇다 말고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공과는 철저해야 하는 법. 자네의 배필로 내 친히, 폐물이 된 넷째 누이를 내어 주겠네. 자넨, 충분히 우리 집안의 사람이 될 자격이 있어."

모용찬이 제 누이를 마치 물건 다루는 듯한 투로 말을 맺었으나 혁전심은 무릎을 더욱 무겁게 찧을 뿐이었다.

"속하, 혁전심. 하해와도 같은 삼공자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깊이 숙여진 그 자세는 가히 검이 제 검집을 향해 바치는 우직한 충심에 가까웠다.

"그나저나 자네도 참 지독해. 어찌 제 손으로 모시던 소저의 용모를 그토록 무정하게 망가뜨릴 수 있었나. 아녀자에겐 그것이 무엇보다 중할 터인데. 허나 자네가 이제 낭군이 되어줄 몸이니, 원망하고 싶어도 그리하지는 못하겠지."

조소 섞인 핀잔에도 혁전심은 머리를 조아린 채 낮게 읍했다.

"속하의 하늘은 오직 도련님뿐이옵니다."

그 복종의 태를 굽어보며 모용찬은 천하가 이미 제 손바닥 위에서 굴러가는 것처럼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도 그 밤의 밀담도 그가 제 뜻대로 쥐고 흔든다 믿는 그 밤조차도 처마 위 암야 속에서 굽어보는 또 다른 누군가의 눈 아래 놓여 있었다.

*    *    *

새벽녘이 밝자 사내는 독단²²을 잘게 부수어 삼켰다.
독단을 제 몸으로 시험해 본 자는 드물었다.
애초에 그것은 독공을 수련하거나 혹은 음지에서 구르는 자가 아니고서야 만져 볼 연조차 쉽게 닿지 않는 물건이었고 워낙 성질이 음독하고 괴랄하여 잘못 들이켰다간 십중팔구 명줄이 끊어지는 독물이라 제 몸으로 그 효험을 가늠해 본 자는 당금의 강호는 물론 고금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드물 터였다.
하지만 사내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극히 잘게 쪼개어 치명에 이르지 않을 만큼만 들이키면 목숨이 단박에 끊어지는 대신에 찰나 동안만 육부를 뒤틀어 그 몰골이 얼핏 보기엔 역병에 걸린 병자와 다를 바 없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사내는 일부러 병색을 감추지 않은 채 새벽 연무에 앞서 빙전단주의 앞에 섰다.
사내의 낯빛이 잿빛으로 죽어 있는 것을 보자 빙전단주의 안색이 곧장 굳었다.
그는 일찍이 성외²³에서 역병을 얻은 자들을 한곳에 몰고 출입을 막아 세우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던 터라 사내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병증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본디 식솔이 많고 드나드는 발길이 잦은 큰 세가일수록 병증 하나에도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역병의 풍문은 한 번 돌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온 성시를 뒤흔드는 법이었다.
빙전단주는 사내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손짓으로 막아 세우며 당장 세가 밖의 의원을 찾아가 몸부터 살피고 오라 명했다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모용가를 벗어났다.
바깥 공기가 폐부에 스미자 사내는 입가에 맺힌 검은 침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가장 먼저 제생방²⁴으로 향했다.

"오공자의 명으로 왔네. 숨은 붙어 있으되, 혼절한 시체처럼 보이게 할 귀식단²⁵이 필요하네. 배합과 농도는 이 죽간에 적힌 그대로 따르되, 한 치의 어긋남도 있어선 아니 되네. 시급을 다투는 일이고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네."

약방의 노의원은 처음엔 눈을 좁혔으나 전표의 두께를 보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
다만 죽간에 적힌 약재를 구하고 빚어는 데에는 며칠 시일이 든다며 다시 발걸음 하라 일러둘 뿐이었다.
사내가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양주에 뿌리내린 소명파²⁶였다.
소명파는 연원이 깊지 않아 살문의 법통을 이은 문파라 부르기엔 모자란 데가 많았고 실상은 이합집산하는 흑도의 해결사 무리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받은 삯만큼은 반드시 일을 해냈고 한 번 문 일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근성으로 일대에 악명이 자자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엔 사내가 혁전심의 이름을 꺼내자 그들은 손사래부터 쳤다.
양주에 터를 둔 방파이니 모용가의 눈 밖에 나는 일만큼은 그들로서도 아무리 삯이 후하다 한들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 까닭이 없다는 투였다.
하여 사내는 공연히 더 말을 보태지 않고 단지 품속에서 전표 스무 장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탁자 위로 용하전장에서 통용되는 전표들의 모서리가 가지런히 포개지고 이어 금자 하나가 그 위를 낮게 구르며 멈춰 서자 그제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자들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잠시 전표의 두께와 금자의 빛을 번갈아 재던 그들은 이내 손을 뻗어 그것들을 거두어 들였다.

"보름 안에 끝내 주겠소. 연통은 어디로 넣어주면 되겠소?"

그 말은 호기라기보다 이미 물은 먹잇감을 끝내 놓지 않겠다는 소명파 특유의 지독한 성미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일이 끝나거든, 몽운루²⁷에서 산금야왕²⁸을 찾으시오. 산금야왕께 올릴 소식이 있다고만 전해도, 내 귀에 닿게 될 것이오."

사내는 그 말을 남기고 비단과 포목이 쌓인 금의방²⁹을 찾았다.
고관대작인지 거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화려한 보의³⁰들만 골라 몸에 걸치고 흐트러짐 하나 없도록 의관을 새로이 정비하였다.
사내가 그 차림으로 몽운루에 들어섰을 때, 그를 빙전단의 말단 무인이라 여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며칠 동안 양주제일기루의 최상층으론 산해진미가 끊이지 않게 올라가며 기녀들이 들락이는 환락연이 밤마다 벌어졌다.
몽운루 안팎에선 최상층의 누각을 통째로 빌려 눌러앉은 정체불명의 재신³¹이 대관절 어떤 위인인지 얼굴 하나 제대로 본 자가 없건만 어느새 그를 산금야왕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 별호인즉슨 기루를 제 집처럼 삼고 숨을 쉴 때마다 금을 뿌리는 밤의 왕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금으로 흥을 사는 큰손들이 으레 그러하듯 산금야왕은 양주제일미녀를 은밀히 자신의 처소로 불러 들였다.
몽운루의 최고 명기³²는 불려 올라오자마자 곧장 허리를 숙였다.

"소첩을 찾으셨나이까?"

산금야왕이 며칠째 금전을 물 쓰듯 흩뿌리고 있으니 그의 심사와 한마디 한마디에 곧 몽운루의 금일 매상이 달려 있었다.

"오, 장매! 냉큼, 앉으시오. 어찌 기루에 온종일 묵는데도 내 장매의 옥안을 보기가 참, 쉽지 않구려."

그러나 장손혜는 문가에 잠시 멈추어 선 채 속으로 가늘게 한숨을 삼켰다.
그녀에게 양주제일미녀라는 수식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닌지라 돈푼깨나 쥐었다는 졸부들은 저마다 저런 식의 느끼한 추파를 늘어놓아 이런 일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싫증을 내색 하나 하지 않은 채 마치 처음 듣는 치레인 듯 입가에 엷은 웃음을 걸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몽운루의 산금야왕께서 부르시니, 소첩이 어찌 늦겠사옵니까."

사내는 대답 없이 탁자 위에 종이 뭉치를 올려놓았다.
그것은 겉장만 침명동의 밀서처럼 꾸며 알맹이는 뜻도 통하지 않을 허자들만 빼곡한 물건이었다.
장손혜의 두 눈이 종이 뭉치 위에 내려앉았다.

"…이것들이 무엇인지요?"

사내는 손가락으로 종이 뭉치를 한 번 두드렸다.

"혹여… 모용가 쪽에서 누가 오면 말이오… 꼭 공자들일 필요도 없고, 그저 그쪽 사람 냄새가 나는 자면 더 좋고…"

사내는 일부러 말을 흐리듯 속삭였다.

"물론, 참으로 그 지체 높은 공자들이 오게 되면… 그야 더 재미지겠지만, 아무튼, 모용가의 사람이 이 몽운루에 발을 들여 그대와 가까이 얽힐 일이 생기거든, 적당한 틈을 봐서… 제 품의 것과 이것을 슬쩍 바꿔치기해 두시오."

장손혜는 미간을 좁혔다.

"…오실지, 안 오실지도 모르는 객을 두고, 소첩더러 그리 큰일을 맡기시는군요."

사내는 품속의 전표를 모조리 꺼내 장손혜의 손과 맞포개듯 눌러 쥐여 주었다.
그것은 모용찬에게서 청부의 선금으로 받아 낸 것들 가운데 아직 품속에 남아 있던 몫이었다.

"이건, 미리 내놓는 수고비라 생각하구려. 세상일이란 본디 와 봐야 아는 것이고… 안 오면 마는 것이지. 다만, 오기만 하면, 그땐… 장매의 영명이 명불허전이라는 걸, 내게 보여주면 되는 거요."

장손혜는 손에 쥐어진 전표와 종이 뭉치를 번갈아 보다가 나직이 웃었다.

"듣자 하니, 소첩이 손해 볼 장사는 아니군요. 바꿔치기한 뒤엔… 소첩이 어찌하면 되겠사옵니까?"

사내는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진짜는 따로 빼돌려 내게 넘기시오. 가짜는 품속에 그대로 남겨 두면 되오. 그 뒤의 일은… 그대가 몰라도 되는 일이지."

장손혜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산금야왕이 여전히 양주제일기루의 최상층에 기거하는 틈으로 보름이 지날 동안 소식들은 하나씩 사내의 귀에 당도했다.
혁전심이 죽었다.
모용찬이 몽운루에 들었다.
모용가의 삼공자가 혈음단³³과 묵설단의 대주³⁴급 인사들을 대동한 채 벌인 성대한 주연의 밤이 지나고 오래지 않아 저잣거리에는 한 가지 풍문이 빠르게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산금야왕이 끝내 제 재산을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풍문이 양주의 시가를 떠돌며 사람들이 혀를 찰 무렵에 세가 밖에서 역병을 고치고 돌아온 빙전단의 말단 무인 하나는 다시 모용가의 문턱을 넘었다.
세간에선 전자의 허망한 영화만 수군거렸고 정작 후자가 품고 돌아온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¹ : 沈明洞
² : 慕容家
³ : 洋州
⁴ : 黑道三家
⁵ : 白道
⁶ : 公子
⁷ : 氷電團
⁸ : 血鈺盃
⁹ : 世外
¹⁰ : 赤露缸
¹¹ : 赤香
¹² : 四女
¹³ : 寒臣團
¹⁴ : 排角山
¹⁵ : 寒血劍
¹⁶ : 龍河錢莊
¹⁷ : 傳書鳩
¹⁸ : 睡穴
¹⁹ : 暗幕
²⁰ : 死地
²¹ : 墨雪團
²² : 毒丹
²³ : 城外
²⁴ : 濟生房
²⁵ : 龜息丹
²⁶ : 燒命派
²⁷ : 夢雲樓
²⁸ : 散金夜王
²⁹ : 錦衣房
³⁰ : 寶衣
³¹ : 財神
³² : 名妓
³³ : 血陰團
³⁴ : 隊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