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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눅눅했다.
비가 온 것은 아니었으나 냄새는 물먹은 흙처럼 습했고 창호지 바깥을 스치는 바람 또한 마른 바람이 아니었다.
사내는 거처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등잔불은 낮았고 방 안은 고요했다.
이따금 기름 타는 소리가 아주 가늘게 일었으나 그조차 적막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내는 곧장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밖의 기척 또한 재촉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은 수상했다.
다급한 전갈은 두드리는 법이고 위세를 믿는 자는 문을 밀고 들어오는 법이었다.
그러나 바깥에 서 있는 자는 둘 다 아니었다.
그저 안에 있는 자에게 제 존재를 한 번 드러내고는 다시 침묵 속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사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문 앞에 다가선 사내는 문틀에 손을 얹은 채 잠시 귀를 기울였다.
기척은 없었다.
문을 밀자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젖은 밤기운만이 처마 밑에 고여 있었고 문지방 바로 앞으로 비에 젖지 않을 만큼 안쪽으로 밀려 들어온 자리에 서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묵빛이었고 봉랍은 없었다.
다만 서찰의 가장자리에는 머리카락보다 가는 적실 한 올이 감겨 있었는데 그것은 침명동¹에서 목각 인형을 문설주에 매달아 둘 때, 쓰는 것이었다.
이를 정해진 방도로 풀면 탈이 없으나 그렇지 않으면 적실이 당겨져 속지에 먹물이 번지고 안의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사내는 몸을 굽혀 서찰을 집어 들었다.
* * *
사내는 자정이 되기 한참 전부터 길에 올랐다.
발주²의 토박이들에게 듣기로 맹아굴³은 사막의 초입에서 멀지 않았으나 그 길은 사람의 왕래가 완전히 끊겨 결코 곧지 않았다.
바람에 쓸린 황토 협곡을 지난 뒤부터는 길이라 부를 만한 것도 사라졌다.
달은 구름 뒤에 숨어 희미했고 대지는 메말라 있었다.
밤공기조차 서늘하기보다 건조했다.
사내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츰 목 안쪽이 까슬까슬하게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멀리서 보면 달빛 아래 검은 점 하나가 사구를 더듬어 가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가까이서 보면 발을 옮기는 법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서찰에 따르면 이곳에 침명동이 있었다.
깊은 사막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사람의 기척과 세간의 법도가 마지막으로 끊어지는 이곳에.
그렇게 사내가 한참을 더 걸었을 때였다.
언덕 하나를 돌아 넘는 순간, 앞쪽으로 검은 바위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모래뿐인 곳에서 그 바위들은 유난히 어둡고 무거워 보였다.
달빛을 받아도 희끗해지지 않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 안에 월광이 아닌 다른 것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 바위 무리 앞에서 사내는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인기척은 없었다.
바람만이 낮게 불었다.
그러나 사내는 알고 있었다.
이쯤부터는 이미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는 것을.
사막은 숨을 데가 없는 곳처럼 보이나 조금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어디든 몸을 감출 수 있는 땅이기도 했다.
사내는 품속의 서찰을 꺼내 들었다.
굳이 높이 치켜들지는 않았다.
그저 남이 보고자 하면 볼 수 있을 만큼만 손에 쥔 채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낮은 사구의 등성이에서 기척이 차례로 솟았다.
* * *
맹아굴은 바깥에서 본 것보다 깊었다.
처음 몇 걸음은 몸을 반쯤 굽혀야 했으나 안쪽으로 갈수록 천장이 높아졌다.
바닥은 모래와 돌이 뒤섞여 있었고 군데군데 오래전에 누군가가 손을 본 듯 평평히 다져져 있었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굴은 넓은 공동으로 이어졌다.
공동 한가운데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영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홈마다 등잔이 하나씩 놓인 좌우의 토벽을 따라 혹은 천장에 늘어진 석순의 그늘 아래서 흑의를 걸친 자들이 적막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내가 대강 헤아려도 스무는 족히 넘었고 어둠 속에 잠긴 자리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더 될 수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예리한 도검이나 짧은 쌍차⁴를 허리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떤 자는 팔짱을 낀 채 돌기둥에 기대 있었고 어떤 자는 허리를 굽힌 채 낮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으며 또 어떤 자는 처음부터 석주처럼 굳어 있어 얼핏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결같은 점이 하나 있었다.
시선은 사내에게 쏠려 있으되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 기색은 없었다.
사내가 생각하기로 저들이 윗자리라고 해서 다른 자들과 사람됨이 다를 것은 없어 보였다.
이곳에 모인 살수들은 많았으나 시선을 두는 법 또한 하나였다.
사내는 그 숱한 시선 한가운데를 태연히 지나 석탁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석탁 뒤 정중에 앉아 있던 노살수가 입을 열었다.
"왔군."
그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공동의 끝자락까지 또렷이 닿을 듯 사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건만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으니, 노부가 더 황당하군. 이건 전음입밀⁵이라는 강호의 절전된 수법일세."
사내 역시 같은 수법으로 응수했다.
"알고 있소."
노살수의 안색에 언뜻 당혹이 스쳤으나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신색을 되찾았다.
"허… 제법이군. 어찌 되었거나, 이번엔 인형이 아닌 서찰이었으니, 의문이 들었을 것이네."
사내가 짧게 답했다.
이번엔 전음이 아니었다.
"오라 했으니, 왔을 뿐이오."
사내의 대꾸는 듣는 이에 따라선 사뭇 무례하게 들릴 법하게 퉁명스러웠다.
과연 공동 둘레에 늘어선 몇몇 살수들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어떤 자는 팔짱을 풀었고 어떤 자는 벽에 기대고 있던 어깨를 떼어내며 사내의 행색을 훑었다.
새삼 치기어린 살수 하나가 이만한 자리에서 저토록 무덤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달갑게 받아들일 말투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노살수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사내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가의 주름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라 하기에는 옅었고 못마땅함을 눌렀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담담한 기색이었다.
도리어 그는 방금의 대꾸에서 무례와는 다른 무언가를 읽어낸 듯했다.
그것은 괜한 허세를 부려 제 분수보다 큰 기세를 흘리는 객기도 독한 성정을 앞세운 거친 혈기도 아니었다.
정녕 그리 생각하였기에 그리 말했을 뿐이라는 투박한 진심이었다.
당금의 강호에선 이런 부류가 되레 드물었다.
"…허허."
노살수가 낮게 숨 비슷한 웃음을 흘렸다.
"자네는 참으로 쓸만한 젊은이로군. 천하에 이만한 인물이 흔치 않지."
그는 사내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마른 손을 소매 밖으로 꺼내 석탁 위에 얹었다.
손등엔 검버섯 같은 얼룩이 성기게 떠 있었고 마디는 불거져 있었으나 손끝엔 늙은이 특유의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단단하게 단조된 쇠붙이처럼 정갈하고 예리했다.
"노부는 본동의 동주⁶이자 철전자⁷라고 불리네."
철전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허나 그 담담함은 노신의 쇠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켜 온 탓에 더는 보탤 말이 남지 않아 생긴 종류의 것이었다.
"다른 이름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지."
철전자는 거기까지 말하고 공동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사내 또한 사방의 어둠을 훑었다.
등잔불이 미치지 않는 그늘 아래 앉거나 서 있는 검은 인영들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저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 또한 다르지 않네. 이곳엔 사형사제를 나누는 사승의 위계도, 항렬의 정리 또한 따지지 않아. 오직 철율행자⁸라는 이름만이 있을 뿐이네."
철전자는 손끝으로 석탁을 한 번 가볍게 문질렀다.
"철이란 뜻을 굽히지 않으며 단단히 지키기 위함이고, 율이란 법도를 어기지 않고 새로이 세우기 위함이며, 행자란 철율로서 움직이는 자들이란 뜻이지. 듣기엔 거창할지 몰라도 실상 별것은 없네. 살아 있는 검집쯤으로 여겨도 틀리진 않아."
사내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자네는 지금껏 본동의 일을 제법 잘 해주었네."
철전자는 손가락으로 석탁을 한 번 가볍게 두드렸다.
"피를 보아야 할 때는 피를 보았고, 피를 감추어야 할 때는 확실히 감추었지. 이것은 단지 무공의 쾌속함만으로 풀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피가 누구에게 튈지, 뒤에 남은 자들이 어떤 허상을 쫓을지까지 미리 짚어 두어야 하니까."
그의 눈빛이 사내에게 가라앉았다.
"그런 면에서 자네의 수완은 제법 쓸 만했네."
사내는 줄곧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이제 본인의 쓰임새를 좀 더 중한 데에 쓰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려."
철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정말 영민하군. 그래서 노부가 자네를 이곳까지 부른 것이네."
그는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본동은 오래도록 강호의 음지에서 힘을 길러 왔네. 누군가는 제 한몸의 영달을 위하여 독을 풀거나, 누군가는 원한을 지우기 위하여 독을 풀거나, 본동은 그 둘을 한데 묶어 일을 도모해 마땅한 삯을 받아 왔지."
풍진이 켜켜이 밴 얼굴 위로 등잔불이 반쯤 걸치고 지나갔다.
"세인들은 우리를 인의도 모르는 금수⁹니… 수라⁹니… 사마외도¹⁰니… 손가락질하지만, 실은 이 안에도 엄연한 법도가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 또한 있는 법일세."
사내는 눈을 들었다.
철전자의 말은 길었으나 헛돌지 않았다.
일부러 멀리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본론을 꺼내면 너무 날이 서는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줄여야만 했다.
"이번 청부는 선을 넘은 자를 위한 것이겠군."
철전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말귀가 밝아."
그는 좌편에 놓인 목함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다시 사내를 보았다.
"본동과 연이 있는 자들은, 왕왕 맺은 연을 끊고 손을 털을 때도 있네. 그 연유야 일일이 헤아릴 순 없겠지만, 두려워서든… 욕심이 동한 탓이든… 아니면, 제힘으로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여겨서든… 그런 치들은 대개 오래 살지 못하지. 장부가 한입으로 두말을 해서일 수도 있고, 본동의 행사가 어디에 닿는지, 누구의 피를 불렀는지 쓸데없이 많은 것을 알면서 입이 가볍기 때문일 수도 있고. 때로는 감춰져 있을 때에야 값이 되고, 새어 나가면 재액이 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니."
철전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단지 본동을 등진 데서 그치지 않네. 일을 물어오고 값을 흥정하던 자가 줄을 잘못 섰으니, 그간 본동에 들던 청부가 암막¹²으로 새고, 본동의 행로가 저들 발밑에 먼저 깔린 것도 그 탓이네. 하여, 노부가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라도, 그 치에게 어느 동아줄이 더 질긴지 깨닫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어조는 차분하였으나 속에는 바짝 마른 살기가 얇게 깔려 있었다.
"그래서 자네 같은 젊은이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기고 싶어 불렀네."
철전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좌편의 목함을 손으로 짚었다.
"노부에게 가까이 오게."
사내가 다가서자 철전자는 목함을 들어 올렸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석탁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사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철전자의 다른 손이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두 손가락이 맥문에 얹히는가 싶더니 찰나의 숨결 사이로 철전자의 공력이 사내의 경맥을 훑고 지나갔다.
사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뭘 한 거요?"
철전자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러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함을 사내에게 건넸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는 사내의 손목을 놓아주며 덧붙였다.
"나가면, 자네의 처소를 안내할 행자가 붙을 걸세. 목함은 거기서 개봉하도록 하게."
사내는 목함을 받아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곧 사내의 기척이 공동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공동 안에 있던 철율행자들 가운데 하나가 철전자에게 물었다.
"철노인, 저자의 내력을 알겠소?"
철전자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는 사내가 사라진 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가늘게 내리뜨며 짧게 숨을 골랐다.
"음… 노부가 강호를 오래 유랑하였으나,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로군."
묻던 철율행자가 미간을 좁혔다.
말뜻을 쉬이 알아듣지 못한 듯 그는 다시 물었다.
"무슨 뜻이오?"
철전자는 방금 짚어 본 맥의 여운을 다시 좇는 듯 손가락 끝을 가만히 맞비볐다.
"저자의 진실된 내력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네. 기혈의 흐름이 역천¹³으로 돌아 기이하기 짝이 없고, 사문¹⁴이 어디인지 또한 쉬이 가늠할 수 없어. 강호는 넓고 기인은 많다 하나… 적어도 노부가 본 자들 중에 저자만큼 난해한 자가 없군."
* * *
태평상회¹⁵의 외원은 꼬리를 물고 마차와 수레가 드나들었다.
바퀴가 돌 때마다 흙먼지가 부단히 피어올랐고 짐꾼들은 이를 악문 채 그 먼지를 들이쉬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 문전에 걸린 거대한 편액의 금박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고 넓은 뜰에 가득 밴 찻내는 그곳을 진하게 떠돌았다.
그 진귀한 차향은 사람의 마음을 평온케도 하지만 그윽할수록 추악한 오취 또한 덮을 수 있었다.
겉으론 태평이라 하나 저 문턱 안으로 드나드는 것들은 필시 찻잎과 비단뿐이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사내의 어깨 위에 얹혀진 무게는 곧 은자와 금자의 무게이기도 했고 강호의 음모나 권세가의 욕망이기도 했다.
상회에서 글도 모르는 촌부에게 바라는 것은 충성도 재주도 아니었다.
적당히 힘을 쓸 줄 알고 분위기를 헤아리는 데 능하면 족했다.
그렇기에 사내를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객행이란 본디 문턱을 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행인들의 이목에서 먼저 지워지는 것.
사내는 그것을 살계¹⁶에 몸담은 살수들이 독공¹⁷과 암수보다 힘써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덕목은 표적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긴 시간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여원개는 매끼마다 은사침¹⁸으로 음식과 술을 찔러 독살을 경계했고 거처의 안팎엔 겹겹의 호위를 세워 제 신변을 지켰다.
출입에는 늘 수행이 따랐고 사위는 물론 기와 위에도 눈길이 비는 때가 없었다.
게다가 방 안에 피워 두는 향마저 밤마다 바꾸었고 묵는 거처 또한 번갈아 옮겼다.
그만큼 그의 주변엔 누가 보아도 틈이라 부를 만한 자리가 없었다.
사람이든 독이든 암기든 그에게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몇 겹의 벽을 넘어야 했다.
사내가 느끼기에도 여원개는 실로 틈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그토록 겹겹이 스스로를 둘러쳤으니 도리어 그로 인해 생기는 틈 또한 없지 않았다.
천잠사¹⁹로 짠 호신갑은 그의 미진한 호신기공 대신에 온갖 암기를 막아 주었으나 오래 두르고 있으면 열이 빠지지 않아 땀이 쉬이 찼다.
그래서 여원개는 취침에 들기 전이면 늘 약탕에 몸을 담그고 온욕으로 땀을 씻어 내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욕간²⁰은 태평상회의 별원 깊숙한 곳에 따로 있었다.
여원개는 욕간 바깥까지는 호위를 허용했지만 정작 탕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만은 엄하게 금했다.
문 앞에 서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문턱 안쪽은 오롯이 그의 영역이었다.
설령 오래 곁을 지킨 심복이라 한들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었고 시종들 또한 탕물과 의복만 갖다 놓은 뒤, 허리를 숙인 채 조용히 물러날 뿐이었다.
그 철저한 고립이야말로 방도를 찾지 못해 죽어가는 살행의 유일한 활로였다.
사내는 며칠에 걸쳐 별원의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숯 광주리를 나르고 장작을 쪼개어 불 쑤시고 마침내 약탕을 데울 화방²¹의 불길을 살피는 일까지 자연스레 사내의 손에 넘어왔다.
사내는 청부의 성사가 목전에 다가왔음에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인 채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사람이란 늘 같은 자리에 늘 같은 사람이 있으면 이내 병풍처럼 여기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눈에 오래 익은 병풍일수록 쉬이 의심을 사지 않는 법이었다.
* * *
두어 달이 지난 뒤에도 사내는 여전히 별원의 욕간으로 이어지는 불길을 맡은 화로 앞에 앉아 손을 쬐고 있었다.
여원개 또한 지난 두어 달과 다름없이 욕간에 들었다.
늘 그러했듯 약탕에 몸을 담그고 자욱한 김 속에 잠겨 밤을 허비하고 있었다.
사내는 말없이 부지깽이를 뻗어 숯더미를 슬며시 헤집었다.
불길이 지나치게 성하면 여원개는 노기를 터뜨릴 것이고 반대로 화기가 식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속불이 무너지자 붉은 불똥이 아래에서 흩어져 올랐고 재 속에 묻혀 있던 불씨들은 비로소 숨을 되찾은 듯 희미한 빛을 토해냈다.
사내는 불길이 지나치게 치솟지도 그렇다고 죽은 듯 가라앉지도 않게 조심스레 화로 속을 고르고 또 골랐다.
숯과 장작을 갉아먹으며 일렁이는 이 붉은 불꽃이 바로 오늘, 여원개의 명을 거두어 갈 불길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여원개가 친히 한 번 더 불길을 돋우라 이르게 만드는 데 있었다.
사내는 장작 하나를 발끝으로 밀어내고 재를 얇게 덮었다.
불길은 당장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만 숨을 죽이며 약탕의 온기를 한 점 한 점 더디게 거두어 갈 것이었다.
사내는 그 곁에서 장작을 다듬는 척하며 기다렸다.
이윽고 욕간 안에서 심기가 뒤틀린 여원개의 음성이 문틈을 타고 흘러나왔다.
"누구 있느냐."
날 선 부름에 문밖을 지키던 시종이 잽싸게 몸을 낮췄다.
"예, 회주님!"
시종이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더욱 허리를 숙이자 문틈 너머에서는 더운 김과 함께 못마땅한 기색이 한층 짙게 흘러나왔다.
"화아두²²에게 불길을 더 살리라 전해라. 오늘따라 어찌 이리 불을 죽여 놓았더냐. 이젠, 눈을 감고도 불 조절이 손에 익었을 때가 됐거늘…"
문 안쪽에서 혀 차는 소리가 싸늘하게 흘러나오자 시종은 더 지체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황망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거의 달리다시피 옷자락이 휘날리도록 화방으로 내달렸다.
회랑을 가르며 지나가는 동안에도 귓가에는 방금 전 들은 여원개의 혀 차는 소리가 쉼 없이 맴돌았다.
그래서 화방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숨이 가빠져 있었으나 그는 숨을 고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숯내가 훅 끼쳐오는 자욱한 열기 속에서 사내는 묵묵히 장작을 깎고 있었고 그 태연한 모습이 오히려 시종의 심기를 더 거슬리게 했다.
회주의 심기가 뒤틀린 마당에 세상모르고 손이나 놀리고 있으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화아두, 이 둔한 놈아! 네놈이 어찌하여 아두²³라 불리는지, 오늘 뼈저리게 알겠구나. 장작은 그만 만지고, 냉큼 불길부터 살려라! 회주님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시다!"
그는 사내를 업신여기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내는 짐짓 놀란 낯빛을 지으며 허둥대는 시늉으로 부지깽이를 집어 들어 불부터 다시 살폈다.
시종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성이 풀리지 않는지 연신 혀를 찼다.
그러고는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소맷자락을 떨치며 화방을 나가 버렸다.
이내 불길은 다시 살아났다.
사내는 잠시 화방 문쪽을 바라보며 시종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회랑이 다시 잠잠해지자 사내는 비로소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사내의 손가락 사이로 작은 향낭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잠시 향낭을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부지깽이 끝으로 숯더미를 헤쳐 가장 붉게 달아오른 자리를 골랐다.
향낭 속에 든 것은 독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은사침으로는 결코 가려낼 수 없고 더운 김과 함께 은은하게 피어오르면 상처 하나 내지 않고도 사내는 능히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사내는 향낭을 화로의 가장 뜨거운 틈에 밀어 넣었다.
수면향²⁴은 즉시 치솟지 않았다.
그 향은 되살아난 불길이 약탕을 뎁히면 장작 타는 냄새와 자욱해지는 운무 속에 섞여 욕간 안쪽으로 천천히 배어들 것이었다.
그런 다음엔 여원개의 눈꺼풀을 느리게 아주 천천히 짓눌러 그를 다시는 깨지 않을 잠 속으로 끌어내릴 터였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각이 덧없이 흘렀다.
시종은 조심스레 여원개에게 물었다.
"회주님, 물은 괜찮으십니까?"
안에서 잠시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좋다."
짧고 풀어진 목소리였다.
사내는 그 대꾸 하나로 이제 여원개가 더는 말을 남길 수 없음을 알았다.
지금쯤 그의 눈꺼풀은 절반쯤 내려왔을 것이었다.
은사침을 쥘 손도 힘이 풀리고 물장구도 호흡도 무독의 운무 속에서 서서히 무뎌져 가고 있을 것이었다.
사내는 장작을 더 넣지 않았다.
빼지도 않았다.
그저 불길을 살린 채 내버려 두었다.
물은 계속 달아오르고 여원개는 졸음 속에서 조금씩 더 깊이 미끄러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문득 너무 뜨겁다고 느낄 때쯤이면 이미 몸을 일으키기엔 늦을 것이었다.
* * *
시종은 여원개의 온욕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어진다 여겼다.
마침 화아두가 숯검댕이가 된 채 화방을 정리하고 밖으로 물러 나오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서도 그는 쉬이 욕간에 다가서지 못했다.
사내는 차곡차곡 장작들을 별원 담벼락 아래 쌓아 두고 있었고 시종은 그런 모습까지 눈에 담고서도 곧장 욕간으로 다가가지 않은 채 한동안 뜸만 들였다.
그리고 또다시 한 식경 남짓 지난 뒤에야 그는 비로소 문밖에서 조심스레 여원개를 불렀다.
"회주님, 약욕²⁵은 다 마치셨습니까?"
그러나 안에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문밖의 시종이 한 번 더 불렀다.
"회주님?"
시종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욕간을 지키던 호위들과 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으나 방금 전까지의 뜸이 이제는 도리어 불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시종은 마른침을 삼킨 뒤, 다시 한 번 문 쪽으로 허리를 숙여 한층 더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여원개를 불렀다.
"회주님, 소인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요?"
여전히 안은 고요했다.
시종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더는 꾸물거리지 못한 채 다급히 뒤로 물러섰고 호위들은 그제야 주저하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욕간의 문이 부서지며 뜨거운 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여원개는 약탕에 비스듬히 떠있었다.
"회주!"
호위들이 급히 붙들어 몸을 일으켰지만 여원개는 물먹은 포목처럼 늘어질 뿐이었다.
또 다른 호위들은 무언가라도 놓칠세라 사방을 미친 듯 훑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별원과 욕간은 그들 자신이 이중으로 둘러막고 지키던 곳이었다.
누가 숨어들 사각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갈 퇴로도 없었다.
"의원을 불러라! 회주가 쓰러졌다!"
오래지 않아 의원이 불려 왔고 상회의 식객들 또한 회주의 변고를 듣고 잇달아 몰려왔다.
그 중에는 강호에 제법 이름난 고수도 있어 여원개의 눈꺼풀을 들춰 보고 맥을 짚으며 약탕의 약재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헤아렸다.
혹여 발견하지 못했을 암수를 찾아 욕간 안팎을 이잡듯 훑으며 모조리 살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분명한 흉계의 증좌를 찾아내진 못했다.
누가 독을 썼다는 흔적는 없었다.
회주의 몸에 도검이나 진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은사침을 들이댔으나 그조차 허망한 노릇이었다.
애당초 독이 쓰이지 않았으니 부질없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중인들의 눈엔 결벽스러운 태평상회의 회주가 매양 밤이면 들던 약욕 중에 황망히 급사한 형국일 따름이었다.
분주히 오가는 상회의 인원들과 식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뒤편에서 사내는 별원 구석의 우물가에서 얼굴을 씻었다.
표주박의 냉수 위에 떠오른 얼굴은 아직 화아두의 것이었으나 그 아래 드리운 음영은 침명동의 살수였다.
사내는 머릿결에 붙은 재와 물기를 털어 내며 독기 하나 없이 식어 버린 욕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배반자들은 늘 독을 두려워했다.
여원개 역시 다르지 않았다.
독수²⁶를 두려워한 나머지 온갖 독을 틀어막으나 그토록 독수를 지워내고 또 지워내도 끝내 기다리는 것은 저들 스스로가 빚어낸 답일 뿐이었다.
그래서 사내는 그런 자들을 독이 아닌 저들이 제 손으로 마련한 그 답으로 결착을 지어 주곤 했다.
¹ : 沈明洞
² : 渤州
³ : 猛阿窟
⁴ : 雙釵
⁵ : 傳音入密
⁶ : 洞主
⁷ : 鐵箭者
⁸ : 鐵律行者
⁹ : 禽獸
¹⁰ : 修羅
¹¹ : 邪魔外道
¹² : 暗幕
¹³ : 逆天
¹⁴ : 師門
¹⁵ : 太平商團
¹⁶ : 殺界
¹⁷ : 毒功
¹⁸ : 銀蛇針
¹⁹ : 天蠶絲
²⁰ : 浴間
²¹ : 火房
²² : 火阿斗
²³ : 阿斗
²⁴ : 睡眠香
²⁵ : 藥浴
²⁶ : 毒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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