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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바다는 살이 없었다.
파도는 있었으나 심연은 그저 어두운 숨이었다.
그 깊숙한 어둠 속에 가장 무거운 물살을 가르는 등뼈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그 등뼈 위로 먼저 심연의 형제들¹이 태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다의 첫 살결이 피어났다.
그 살결은 곧 등뼈와 심연의 누이였다.
그녀는 파도의 살이자 심연의 처음이고 마지막 자비였다.
그녀는 형제들을 따라 바다에 집을 세우려 했다.
형제들은 파도를 갈라내어 길을 내었고 누이는 그 위에 살을 얹어 숨을 불어넣었다.
그 숨결로 태어난 것이 바다의 왕녀들²이었다.
심연의 누이는 바다의 본디 질서를 두려워했다.
형제들은 파도가 살을 삼키고 약한 것은 뜯기고 강한 것이 더 강한 것에게 찢기는 순리를 율법이라 불렀고 그것이 그들의 눈에 심히 좋아 보였다.
그러나 누이는 그것을 가혹하다 여겼고 땅에서 빌려온 축복의 틀을 파도 위에 덧씌웠다.
그녀는 딸들이 무기를 쥐지 않고도 다스릴 수 있게 하였다.
그녀는 딸들이 씨앗을 품지 않고도 무리를 빚을 수 있게 하였다.
그녀는 딸들에게 세월의 꽃을 안겨주되 그 꽃잎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딸들은 그런 그녀를 어머니이자 해신이라 불렀다.
심해의 군주들은 그것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온기는 율법을 썩게 했다.
누이가 만든 딸들은 그 어미의 형상을 빼닮아 심히 아름다웠으나 본디 그 아름다움은 파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야 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누구도 해신에게 칼을 겨누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들의 누이였고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러다 등뼈가 누이에게 물었다.

"너의 숨결이 파도를 덮을 수 있다 생각하는가? 너의 살결이 심연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대신 딸들을 돌아보았다.
차마 그 살들을 찢어 되돌리지 못했다.
그 대신 그녀는 스스로를 찢었다.
등뼈는 다만 타일렀을 뿐이었으나 황망하게도 그것은 심판과 같이 누이를 짓눌렀고 그녀는 그 무게에 깔려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무엇보다 두려웠다.
자신과 그녀가 낳은 딸들의 비늘 위로 언젠가 드리워질 심연의 이빨을.
살결을 찢고 들어올 그 불가피한 운명의 그림자를.
율법의 이름 아래 자신의 딸들이 가차 없이 찢기고 삼켜지는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분명히 그날이 오면 그녀의 형제들은 아무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이것이 옳다."

파도는 해신의 피를 마셨고 살결은 썩어 바닷속에 스며들었다.
그 부패한 축복은 해신의 형제들이 따르던 본디의 질서를 잠에서 깨웠다.
그제야 약한 살이 이빨을 삼키고 강자의 씨앗은 딸들의 태내에 깃들었다.
신성과 비천의 경계는 파도 아래에서 얽혀 하나가 되었다.
그날 이후, 등뼈는 등을 꺾지 않았다.
그의 깊은 눈은 가라앉은 파도를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어떤 심연도 더 이상 사랑하던 누이의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그저 파도 아래에 울음을 삼키고 가라앉아 바다를 무겁게 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죄였고 그들의 비탄이었다.
심연은 애도할 뿐 이제 더는 손대지 않았다.
그 애도는 곧 파도의 무정함이 되었다.

*    *    *

바다가 숨을 거두었다.
숨이 멎은 건 신이 먼저였을까.
신의 딸들이었을까.
인어들은 알 수 없었다.
그녀들은 바다의 비늘로 살을 감고 신의 숨결로 피를 물들였다.
그녀들의 손끝에서 작디작은 파도가 뒤집혔고 물결이 부서질 때마다 종복³이 태어났다.
인어의 손은 무기를 쥐는 손이 아닌 다만 빚는 손이었다.
신의 숨결을 가슴에 품고 비늘을 깎아내어 종복의 등껍질을 빚고 이빨을 다듬고 발톱에 바다의 무게를 심어주었다.
그렇게 태어난 종복들은 곧 그녀들의 무력이었다.
본디 그들에게 번식이란 개념은 없었다.
그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빚어졌다.
인어들의 손이 머무는 동안만 존재했고 왕녀들의 숨결이 닿는 동안만 날카로웠다.
그러나 파도를 낳은 신이 숨을 거두었을 때, 숨결은 시들고 축복은 파편처럼 부서졌다.
축복의 끈이 끊긴 종복들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종복의 갑각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질 때까지 그녀들은 그저 바닷속에서 조용히 죽어간 종복의 등에 몸을 맡긴 채 숨죽여 흐느꼈다.
그리고 왕녀들의 손끝에서 빚어진 갑각과 이빨들은 오직 주인의 무릎 아래에서만 숨 쉬다가 주인의 발치에서만 죽었다.
죽은 뒤에도 그들의 파편은 주인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충성이었다.
마침내 인어들은 손을 거두었다.
죽은 것을 다시 빚을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바다의 살을 깎는다 한들 썩어버린 축복은 아무것도 잉태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심연의 율법이 되살아났다.
약한 살은 강한 이빨에 물리고 신의 숨결이 없으면 자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종복들은 알게 되었다.
축복이 사라진 순간부터 지성이 퇴화한 일부는 본능을 뒤적여 인어들의 목덜미를 얕게 물었고 물비늘의 비궁을 향해 제 종자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충동만은 아니었다.
그녀들의 축복으로 영원을 누리던 그들이 시간의 굴레에 묶이자 언젠가 다가올 소멸을 알았고 유일한 방식으로 유산을 남기려 했다.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을 통해 왕녀들을 지켜내고자 함이었으나 그 연유를 이해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은 해신의 직계 혈통인 공주와 사제장들을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잘것없는 종들과 뒤엉켜 살을 섞어야 된다니, 이 어찌 어머니 신의 가르침을 더럽히는 패륜이 아니랴."

그녀들이 보기에 그것은 고귀한 옥좌가 비천한 그릇의 위치로 곤두박질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왕좌는 무너지지 않겠지만 그 위에 올려진 신성은 쉽게 허물어질 수 있었다.
해신의 딸들은 결단코 더럽혀질 수 없었다.

"종복은 이제 짐승일 뿐이다. 이제는 주인과 종의 경계를 잊고, 바다의 왕녀들을 범하며, 심지어는 산채로 뜯어 먹는다."

인어들의 파도에 그 말을 퍼뜨린 것도 그녀들이었다.
이후, 인어들은 종복들에게서 점차 등을 돌렸다.
그러나 남은 종복들은 더욱 굳게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그녀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 없었다.
가녀린 그녀들을 지켜야만 했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멸망을 피해야 했기에.
충동적인 열락과 모욕의 한편에서 자신들의 비궁을 헤집고 태어난 어린 갑각에 젖을 물린 해신의 딸들을 바라보며 종복들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왕녀들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축복이 부패한 이래로 종복이라 불리던 무리가 주인과 교접하지 않고서는 혈통과 충성을 이어갈 수 없고 그녀들을 지킬 수 없다는 내막을 만약 그 진실을 알았다면 해신의 직계들이 퍼뜨린 소문을 떨쳐낼 만한 강단이 있었다면 자애로웠던 바다의 왕녀들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주었으리라.
그것은 서로에게 모욕이 아니라 은총이었을 것이며 강탈이 아니라 축복의 허락이었으리라.
그러나 "종복이 주인을 잡아먹는다"는 공포와 소문은 자애의 눈을 가렸다.
인어들은 그 말을 믿었다.
종복은 심연 아래에서 이를 갈았다.
주인이란 자들이 한 줌의 이탈을 오래도록 이어진 충성의 기억 위에 흉터처럼 덧씌워 남은 모두에게 죄의 낙인을 새기고 있었다.
여전한 굴종 속에서 그들의 내면은 고통과 반역으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주인이란 것들이 겨우 나약한 자궁에 불과하다면 차라리 그것을 취하고 새로운 왕좌의 기틀로 삼으리라.'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주인을 눕혔고 심연의 밑바닥에서 새로운 혈육들이 태어났다.
종복의 씨앗은 빛을 본 지 한 해가 채 지나기 전에 어미의 피는 물려받지 않고 저주스러운 아비의 천성만을 빼닮은 성체로 무르익었다.
인어들의 태내에 깃든 것은 더 이상 충직한 종의 혈맥이 아니었다.
그것은 늙지 않는 어미를 탐하고 핍박하는 무리의 폭력 그 자체였다.
그리고 곧 그녀들은 그들에게조차 바다의 탕녀라 불렸다.
오래된 심해의 군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물결 속에 고요만을 남겼다.
그들은 간혹 해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혀만 삼켰을 뿐 파도는 그저 무정히 흩어질 따름이었다.

*    *    *

마침내 심연의 어둠이 얕은 바다로 밀려들었다.
인어의 성역인 아틀라리아⁴는 수면 아래로 낮게 떨며 빛을 잃은 비늘을 숨겼다.
그러나 심연에서 분연히 일어난 파문은 마치 아틀라리아의 산호벽을 끝까지 집어삼키려는 듯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포위망의 가장자리에 물빛보다 푸른 갑각을 두른 청게 무리가 반역의 파도 위로 몸을 드러냈다.
그 선두에서 거대한 흑비늘의 어인이 심연의 분노를 삼킨 채 고요히 몸을 들어 올렸다.
검붉은 갑각들의 파편이 아틀라리아의 해류 속에서 춤을 추자 그 무도한 무리를 지켜보던 사제장의 목울대는 진노한 바다처럼 흔들렸다.
꼬리지느러미를 움켜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깨진 산호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감히! 종복된 자들이! 어찌 이토록 무례한가! 이곳은 너희 불충하고 야만적인 배반자 무리의 지느러미가 헤엄칠 곳이 아니다!"

그 말에 흑비늘 어인의 아가미 깊은 곳에서 낮고 지친 숨이 흘러나왔다.
바닷물이 그의 갈비 속을 두드리듯 울렸다.

"배반자? 불충하다고…?"

그의 진노한 숨결이 물살을 따라 거품처럼 번졌다.

"배반한 건… 그대들이 먼저 아니었나."

그는 등을 젖히며 물살을 갈랐다.
숨은 물살보다 빨랐고 뒤로 늘어선 갑각의 갑옷 위에 검은 이빨들이 반짝였다.

"먼 심연의 밤을 기억하라! 수없는 세월이었다! 어두운 물살을 가르고, 그대들의 살결에 닿을 이빨을 물리치고, 이 갑각, 이 비늘로… 그대들을 지켜냈다."

그의 손에는 부서진 갑각이 쥐어져 있었고 그것은 이내 물살에 실려 스스로 떠오르듯 수면 위로 부유했다.
어인은 그 조각을 다시 손으로 낚아채어 굳게 움켜쥔 채 사제장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나? 주인을 더럽힌 짐승, 멸망해도 좋다는 낙인… 그게 우리가 무릎 꿇고 바친 오랜 충성의 끝인가?"

그의 목소리는 점점 부서졌다.
울분이 실린 뜨거운 진노가 인어들의 파도를 뒤흔들었다.

"축복이 사라진 자리, 그대들의 품만이 우리의 숨이었다. 품어주면 살았다! 그러나 그대들은 등을 돌렸다. 그 거짓된 혀로, 우리들의 충성을 기어코 짐승의 발정으로 끌어내렸다."

갑각을 쥔 주먹이 물살을 강하게 휘저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답을 내리겠다."

그는 낮게 웃었다.
지친 숨은 웃음처럼 터져 나왔으나 그것은 곧 심연의 진언이 되었다.

"너희는 더 이상 바다의 왕녀가 아니오, 해신의 딸들이 아니다…"

어인의 이빨이 완연히 갑각 너머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 웃음은 울음 같았고 그 울음은 다시 오래된 분노로 이어졌다.

"바다의 탕녀들이여… 너희가 앉을 새로운 왕좌는 옥좌가 아니오, 너희를 위해 우리가 토해낸 정낭의 단상 위뿐이다!"

그것은 파문이었다.

*    *    *

빛 한 줄기도 닿지 않는 해구 속 검고 무거운 물살 아래서 공주 메레이아 코랄린의 비늘은 고요히 흔들렸다.
그녀의 꼬리는 잿빛 해류에 닿을수록 미세하게 떨렸다.
그 앞으로 심연을 가로지른 어둡고 부드러운 곡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모라카의 검은 눈은 아무 감정 없이 어둠을 삼키듯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메레이아 코랄린은 손끝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하얗고 차가운 왕녀의 마력⁵이 심연에 자리한 괴물의 물살로 흩어졌다.

"곰치폭군 모라카, 바다의 깊은 이빨이여. 해신의 혈통으로서 명하노라."

그녀의 의념에 모라카의 길고 부드러운 형체가 물살에 따라 흔들렸다.

"무릎 꿇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삼키고 부수어 흩으라. 바다를 더럽히는 불손한 종복들을 정리하라."

메레이아 코랄린의 목소리는 어두운 수압에 눌려 부서졌다.
그러나 곰치폭군의 눈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잠시 해구의 물살이 고요해졌고 그 고요는 어둠보다 짙었다.
곧 짧고 낮은 웃음 같은 소리가 물살 너머로 번졌다.
그건 웃음인지 울음인지 아니면 해구가 갈라지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모라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곰치폭군의 칼날 같은 이빨 사이로 심해의 수압보다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명령이라."

모라카의 커다란 눈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공주를 내려다봤다.

"너는 내가 해신의 종복인 줄 아느냐."

그의 일부가 부드럽게 꼬리를 감듯 공주 일행의 주위를 스쳤다.
메레이아 코랄린의 비늘이 서늘하게 떨렸다.
꼬리는 본능적으로 움찔하고 움츠러들었다.

"누이의 숨결이 사라진 자리에 너희가 감히 누굴 부린단 말이냐."

모라카는 무겁게 고개를 젓듯 형체를 휘감았다.

"삼켜버리기 전에 꺼져라."

메레이아 코랄린은 꼬리를 움켜쥔 채 숨을 삼켰다.
그러나 비늘 아래로 스며든 두려움을 그녀는 왕족의 자존심으로 떨쳐내었다.

"…이 오만한 놈!"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물살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모라카의 긴 몸통이 부드럽게 파도처럼 흔들리며 메레이아 코랄린의 꼬리와 비늘을 스쳤다.
그녀의 눈은 일순 공포에 물들었지만 메레이아 코랄린은 떨리는 가슴을 붙잡아 간신히 목소리를 뱉었다.

"좋… 좋다, 네놈 따위 필요 없다! 해신의 다른 권속에게 가겠다. 신의 숨결을 나눠 받은 것은 너 하나가 아니니까."

그 말에 해구를 감싸돌던 긴 형체가 멈췄다.
그리고 안쪽으로 검고 공허한 눈 하나가 천천히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그의 긴 꼬리가 물살을 두드렸다.
심해가 낮게 떨리며 해구의 파문이 어둡게 번졌다.

"너는 곧 알게 될거다."

모라카의 검은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러나 그곳엔 분노도 연민도 없었다.
다만 칼날 같은 이빨이 스르륵 닫히고 곰치폭군의 긴 그림자가 해구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잠겼다.

"내가… 그나마 자비로웠다는 것을."

메레이아 코랄린과 그 일행은 결국 모라카의 해구를 떠났다.
해구는 이미 죽은 듯 조용했고 마지막 울림을 끝으로 심해의 물살도 무겁게 꺼졌다.
그녀의 살결에는 아직도 곰치폭군의 차가운 비늘이 스쳐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해신의 다른 권속을 찾아야 했다.

*    *    *

심해의 고요를 뚫고 위로 떠오르자 바닷물은 이상하게도 점점 차가워졌다.
하늘은 이미 비구름으로 무겁게 뒤덮여 있었다.
바다와 맞닿아 잿빛 벽처럼 먹구름이 내려앉았고 수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폭풍은 바다를 짓이기며 무수한 번개로 갈라졌다.
일행의 사제장들은 흐트러진 마력을 다시 엮느라 지쳐 있었건만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더 검고 무정한 바다로 폭풍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파도 위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벗겨질 듯한 강풍이 사방을 할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고르가이던이 있었다.
가장 오래된 해신의 권속이라 알려진 바다의 등뼈.
끝없이 이어진 물비늘 아래 수룡황은 마치 바다 그 자체처럼 누워 있었다.
메레이아 코랄린은 저것이 과연 자신과 같이 숨을 쉬는 생명인지조차 의문이 들었으나 그 몸통이 어쩌다 한 번 일렁일 때마다 거센 해류가 수십 길 아래의 어둠까지 휘갈겼다.
그녀의 일행은 비늘을 떨며 그의 곁으로 나아갔다.
공주의 뒤로 사제장들이 산호로 만들어진 작살에 심해의 소금을 문장처럼 새기며 의식을 준비했다.
썩어버린 해신의 축복이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남은 피라도 짜내야 했다.
의식의 성공을 위해 희생을 자처한 인어들은 저마다 파도 위에 몸을 눕히듯 허공에 마음을 눕혔다.
작살에 찔린 그녀들의 마력이 부서진 비늘처럼 흩어졌고 하나로 다시 묶였다.
바다를 덮은 비구름이 조금씩 갈라지자 허공을 가르는 번개의 살이 고르가이던의 등비늘 위로 내려앉았다.
그때서야 바다는 이 검은 수룡의 존재를 무겁게 드러냈고 숨이 막힐 만큼 거대한 비늘이 물결을 따라 들썩였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서 세상을 뚫는 듯한 눈 하나가 깜박이며 메레이아 코랄린의 의념을 붙잡았다.
뒤로는 파도가 무너지고 머리 위로는 번개가 찢어졌다.
메레이아 코랄린의 몸 위로 강대한 축복과 두려움이 모두 내려앉았다.
그녀는 비늘에 스며든 공포를 억지로 짓눌러 삼키고 파도의 정점에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르가이던, 해신의 가장 깊고 오래된 권속이여. 우리의 오욕을 정리해다오!"

폭풍 속 물결보다 더 검고 무거운 형체 하나가 파문을 가르며 움직였다.
천둥이 무겁게 쪼개질 때, 고르가이던의 거대한 머리가 하늘로 솟았고 그 안쪽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 하나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공주의 의념에 무심히 닿았다.
거기서 들려온 대답은 마치 번개의 갈라짐 같았다.

"…너희는 종복의 멸망을 바라는가."

메레이아 코랄린의 눈이 흔들렸다.
곁의 사제장들도 공포를 삼키며 간신히 공주에게로 이어지는 마력의 파동을 유지했다.
고르가이던의 목소리는 폭풍 그 자체였다.

"주인과 종이 하나로 엮여있으니, 나는 이를 구분하지 못하겠다."

폭풍 속에서 고르가이던의 꼬리가 천천히 파도를 휘저으니 폭풍의 중심이 일그러졌다.

"그러니, 너희가 바라는 종복의 멸망은 곧 너희의 멸망이다."

그의 말에 메레이아 코랄린의 눈이 힘없이 감겼고 그 모습을 본 사제장 하나가 분노하며 소리쳤다.

"방관자여! 어머니, 해신께서 다시 깨어나시면 네놈을 용서할 성싶으냐!"

그 한마디에 천둥이 찢어지듯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바다와 하늘이 동시에 찢어졌다.
수룡황의 거대한 꼬리가 그 일대를 한순간에 부서뜨렸다.
암초와 사제장이 서있던 바다까지 허무하게 파도를 가르며 부서졌다.
메레이아 코랄린의 몸은 흩어지는 혈흔과 물비늘의 파편을 뒤집어쓴 채 숨조차 삼키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곧이어 거대한 수룡황의 눈동자가 그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깊고 무겁고 빛 없는 등뼈의 시선이 해신의 직계라 불리던 공주의 비늘 위를 무참히 훑었다.

"해신의 딸들이란 게… 내 누이의 딸들이란 게… 겨우 이런 미물에 불과한 것인가. 내 누이의 피와 얼굴을 가진 자들이여, 너희는 그녀의 딸이 아니다. 너희는 그녀를 죽인 자들이다."

그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의 존재는 심연에 대한 모욕이오, 내 누이에 대한 모욕이다."

번개같은 목소리가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가르는 듯했다.

"너희가 내 해역을 떠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바다의 왕녀든 그 불충한 종복이든 구분 없이 모두 멸하리라. 벼락이 열 번 내리칠 동안의 말미를 주겠다. 전부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¹ : Seagrowl
² : Mermaid
³ : Deepkin
⁴ : Atlaria
⁵ : Nano Mach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