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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느와르 소설]살왕지로(殺王之路):그 사내가 강호를 살아가는 법-불살이살 후편(不殺而殺 後篇)
jgkjustcreat 2026. 4. 5. 22:25
배각산¹으로 드는 수렵의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모용가²의 내원은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로 분주했다.
수레엔 활과 화살통이 실렸고 비에 젖지 않도록 기름 먹인 피풍들이 차곡차곡 겹쳐 얹어졌다.
수렵이라 하나 실상은 한 세가의 위세를 산짐승들 앞에까지 들이미는 행차와도 같아서 말고삐를 쥔 시종들조차 걸음을 옮기는 모양새가 사뭇 조심스러웠다.
모용왕은 단촐한 호복³을 걸친 채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얼굴엔 제 발밑으로 모인 사람들을 당연시 여기는 권세가의 무심함이 아닌 수렵을 앞둔 대장부의 가벼운 호기로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의 곁을 에워싼 것은 오공자⁴가 일전에 통솔권을 내어준 빙전단⁵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푸른 단복을 걸치고 모용가의 표식을 단 무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모용왕의 사위를 둘러쌌다.
행군의 박자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눈길이 흩어지는 법도 없었다.
얼핏 보면 세가의 공자들을 보위하는 직속답게 잘 단련된 무인들이라 여길 만했다.
그러나 사내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오롯이 세가에 몸을 담고 있던 무인들은 아니었다.
보법과 호흡이 미세하게 달랐고 검집을 쥔 손의 버릇 또한 검법을 익힌 검객들이라기보다 신속한 출수에만 심혈을 기울이는 자들의 그것이었다.
암막⁶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빙전단의 껍질을 걸친 채 이공자의 가장 지척인 방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대로 진정 세가의 무인들인 이들은 비교적 수렵 행렬의 외곽으로 밀려나 있었다.
말머리를 돌리면 부딪히는 자리도 아니었고 화살이 날아들면 가장 먼저 몸을 던져야 할 자리도 아니었다.
겉으로는 위엄을 불리기 위해 호위의 간격을 넓게 펼친 듯 보였으나 실은 안채에 군도⁷를 들인 형국이었다.
* * *
배각산에 든 초입까진 일기⁸는 썩 견딜 만한 것이었다.
비록 산길엔 눅눅한 흙내가 올라오고 구름은 끼었으되 아직은 참는 기색이었다.
하여 수렵은 예정대로 조를 나누어 산짐승의 흔적을 좇았다.
그러나 한낮을 조금 넘기자 하늘은 더는 버티지 못했다.
먼저 세찬 바람이 산허리를 쓸고 지나갔다.
이어 짙은 흑운이 삽시간에 초목과 대지를 검게 물들였다.
오래지 않아 굵은 빗방울들이 폭포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은 금세 질척한 진창으로 변했고 젖은 말들은 콧김을 거칠게 뿜으며 발굽을 헛디뎠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모용왕은 낯빛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허, 본공자가 날을 잘못 잡았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산바람은 한 줄기 더 거칠게 몰아치며 빗줄기를 비틀어 흩뿌렸다.
이번에 증원된 빙전단 가운데 새로이 꾸려진 동영대⁹의 대주¹⁰가 급히 말머리를 돌려 모용왕에게 돌아왔다.
"도련님! 조금만 더 오르면, 산중턱에 버려진 초옥이 하나 있다 하옵니다. 우선, 그리로 들어 비를 피하심이 어떻사옵니까. 속하가 화신통¹¹을 쏘아 흩어진 빙전단을 모두 부르겠습니다."
모용왕은 빗물에 젖은 옷깃을 한 번 털어 내며 그를 돌아보았다.
"동영대주. 다들 어딘가에서 제 살길을 찾아 비를 피하거나 하산하고 있을 터인데, 나 하나 지킨답시고 꼼짝없이 빗속에 서 있게 만들 셈인가."
그는 잠시 먹구름에 잠긴 산허리를 바라보다가 낮게 덧붙였다.
"자네가 본공자에게 써주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괜히 일을 번거롭게 만들 것 없네. 일단은 그리로 향하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나. 퍼붓는 성미를 보아하니 비가 아주 오래 가진 못할 듯하니… 이랴!"
말은 그리하였지만 못내 심중이 평온하지 못했던 모용왕이 먼저 박차를 가하며 빗속을 갈랐다.
그러나 그가 고삐를 당기며 향하는 곳이 비를 피할 처소가 아니라 제 피를 부를 함정이라는 사실을 주위에 선 자들 가운데 정작 그 자신만이 모르고 있었다.
* * *
비는 모용왕의 예상과 달리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산길의 흙탕물은 어느새 발목께까지 튀고 처마 끝을 때리는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모용왕은 젖은 호복의 물기를 손으로 대강 짜내며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모처럼, 막내의 빙전단과도 얼굴을 익혀 둘 겸 나온 수렵이었거늘… 영 글렀군."
그의 말끝엔 못마땅함보다 미련이 더 묻어 있었다.
모용왕은 본디 제 아래 사람들에게 체통만 내세우는 부류가 아니었다.
이러한 관인함은 흑도¹²의 종주라 불릴 만한 모용가의 공자로서는 드물게 덕망으로도 입에 오르내리게 한 기질이었으나 반대로 수하들의 긴장을 더러 풀어 놓는 흠이기도 했다.
당장 초옥 바깥에서 꼼짝없이 비를 맞으며 미련하게 사위를 지키고 선 자들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가 생각하기로 만일 지금 이 자리에 부친인 모용개가 아니면 셋째인 모용찬이 하다못해 맏형인 모용도가 있었다면 저들은 감히 그 명을 거스르지 못한 채 벌써 안으로 몸을 들여 함께 비를 피하고 있을 터였다.
모용왕이 그런 씁쓸한 상념을 이어 가던 차에 비를 등지고 한 인영이 초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젖은 처마를 지나 문턱을 밟고 들어서는 그 발걸음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누군가 모용왕에게 청해 들인 것도 아니었고 그가 손수 들어서라 허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제 두 발로 걸어들 자격이 충분하다는 양 태연한 걸음으로 나아왔다.
모용왕은 사내의 행색을 한 번 훑은 뒤, 별 뜻 없다는 듯 입가를 비틀었다.
"자네, 설마 혼자만 비를 피하겠다고 들어온 것은 아니겠지? 본공자가 그리 들어오라 했을 적엔, 하늘이 무너져도 발 하나 들이지 않을 듯 버티더니, 천하의 대모용가 사람이 비 몇 줄기에 고집을 접은 건 아닐 테고."
이는 꾸짖음이라기보단 가벼운 희롱이었다.
그러나 이내 모용왕의 전신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 앞에 선 것은 빙전단의 단복을 걸친 무인이었으나 그 행색과 사람의 결이 서로 상이하여 기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윗사람의 농에 억지로 입가를 풀어 보이는 비굴한 기색도 없었고 제 신분을 의식한 긴장도 없었다.
다만 한없이 가라앉아 황천 아래로 깊이 침잠한 듯한 무정함만이 그 낯빛에 서려 있을 뿐이었다.
모용왕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의 검집으로 향했다.
사내는 그 동작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젖은 행색에서 빗물을 한 방울씩 떨구며 묵묵히 안으로 더 걸어 들어왔다.
이윽고 사내는 모용왕과 마주한 탁자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치 본디 앉던 자리에 도로 앉는 사람처럼 천천히 의자를 빼내어 그 앞에 앉았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그제야 모용왕은 농담기를 말끔히 거두고 나직이 물었다.
"…귀하는 누구요."
사내는 대답 대신 제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사내의 손끝에 먼저 닿은 것은 귀식단¹³이 담긴 작은 옥함이었다.
그다음엔 비에 젖지 않도록 피혁으로 단단히 감싸 둔 밀서와 모용찬의 신분패였다.
사내는 그것들을 말없이 나란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젖은 소맷자락에선 떨어진 물방울이 탁자 가장자리를 타고 천천히 흘렀다.
검병을 짚은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로 모용왕은 탁자 위에 꺼내진 물건들과 사내를 차례로 훑었다.
"이것들이 무엇이오."
여전히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빗소리만 초가를 후려치는 가운데 모용왕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초옥 안의 정적이 갈라졌다.
"모용왕."
그 이름 석 자가 초옥 안을 낮게 울렸다.
"그대는, 이 배각산이… 오늘 그대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왕의 눈빛이 싸늘히 식었다.
그러나 그는 출수하지 않았다.
도리어 검병에서 손을 떼고 옥함과 피혁을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없이 한 손을 뻗었다.
피혁을 더듬어 밀서를 끌어왔고 그것은 이내 탁자 위에 단정히 펼쳐졌다.
종이는 구김 하나 먹지 않은 채 새것인 양 반듯했다.
모용왕은 그 위에 시선을 얹히고 천천히 흘려보냈다.
처음엔 단지 미간만 조금 좁혀졌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의 신색은 완연히 굳어 갔다.
끝내 마지막 먹빛에 이르러서는 모용왕의 눈빛은 더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 여기 적힌… 이 흉계들이… 정녕… 정녕 모두 참이오? 귀하는 누구이기에… 본공자가 이토록 참혹한 내막을 들추게 하는 거요."
모용왕은 펼쳐 둔 밀서들에서 간신히 눈을 떼어 사내를 보았다.
"모용왕, 본인은 본디, 그대의 목숨을 거두러 온 사람이오."
그 말에 모용왕의 눈빛이 다시 매섭게 벼려졌다.
"…지금 본공자 앞에서 그런 망언을 내뱉는 까닭이 무엇이요. 본공자를 해하기에 앞서 셋째 놈이 저지른 악업부터 낱낱이 일러 주어, 본공자가 명부¹⁴에 가거든 염라께 그대로 아뢰란 뜻이오?"
하지만 그의 천성은 원체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먼저 그 연유를 따져 보는 쪽에 가까웠다.
하여 치밀던 진노가 한 겹 잦아든 자리로 관인한 심기가 되돌아오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서늘한 침착도 솟아나고 있었다.
찰나에 호흡을 갈무리한 모용찬은 다시 물었다.
"…아니면, 본공자에게… 손을 쓰지 않을 연유가 생긴 것이오?"
사내는 역시 이번에도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가 보기에 모용왕은 아직도 사방을 에운 호위들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설령 눈치챘다 한들 권모에 뜻을 두지 않는 그의 성정상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도 몰랐다.
사내는 잠시 옥외로 고개짓을 했고 모용왕의 시선은 바로 그곳으로 따라갔다.
완전히 헤져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창호 너머로 처마의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무너진 담장 너머에서는 빙전단을 사칭한 흉수들의 기척이 빗속을 어른거리고 있었다.
"모용왕, 그대를 죽이고 달아나는 것쯤이야 본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오. 허나, 그리하는 것은 곧, 내 손으로 내 무덤을 파는 일이기도 하오."
얼핏 허장이나 광오로 여길 만한 말을 듣고도 담담하던 청자가 비로소 표정에 의혹을 띠자 사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는 지금 이 일대에… 그대를 지키고 서 있는 이들이 정녕, 모두 그대의 사람인 것 같소? 그대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이 초옥을 둘러싼 자들은 그대를 호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오. 내가 그대를 해하기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 내가 그대의 목숨을 끊고 이 문을 나서는 순간, 저들은 곧장 내 숨통마저 끊어 놓을 것이오."
모용왕은 사내의 말에 바로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는 겉으로 보기엔 믿기 어렵고 참혹한 진상을 마주한 충격에 들끓는 심기를 삭이려는 듯한 행동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제 곁을 에운 자들을 하나하나 다시 헤아리는 데 잠력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심성과는 별개로 소가주에 가장 가까운 자답게 그가 기감을 여는 기색은 지극히 은밀했다.
마치 숨을 한 번 길게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사위의 흐름을 새로이 재는 듯했다.
밀서를 마주하기 전까지도 모용왕이 실로 의아했던 것은 사내가 이 초옥에 발을 들이기까지 경계를 서던 자들 가운데 누구 하나 외인의 침입을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이 비로소 해소되는 순간, 모용왕의 안색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지금, 이 초옥을 둘러싼 배치는 외적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예봉은 철저히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경계와 시선은 아직 바깥에 머물러 있었으나 심중과 살의는 하나같이 초옥 안에 머물러 있었다.
안에서 누가 뛰쳐나오더라도 곧장 목을 벨 수 있도록 초옥의 중심을 향해 보이지 않는 포위진을 촘촘히 죄어 둔 형국이었다.
"…귀하의 말이 정녕 참이었군."
그 말끝에는 더 이상 사내를 향한 의혹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용찬, 이 찢어 죽일 패륜아 같으니… 지금 귀하와 본공자가 서로의 목을 겨누게 된 이 꼴이야말로, 그놈이 가장 바라는 바겠지."
핏발 선 눈과 금세라도 발검할 듯 불거진 살기가 향한 곳은 눈앞의 사내도 바깥의 흉수들도 아닌 세가에 있을 셋째였다.
"대체 가주가… 가주의 자리가 무어라고… 제 혈육에게 이토록 끔찍한 짓들을 서슴지 않았단 말인가… 참으로… 참으로 맏형님과 넷째가 안쓰럽도다…"
사내는 그의 분노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말없이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옥함을 두드렸다.
그 낮고 둔탁한 소리는 모용왕의 흐트러진 정신을 붙들어 세웠다.
"…둘다 살아날 방도가 있다면, 들어보겠소?"
모용왕의 시선이 곧장 옥함 위로 떨어졌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기에 그리 단언하는 거요."
사내는 덤덤히 답했다.
"이건 귀식단이란 것이오. 복용하면 전신의 모혈¹⁵이 열려 피부로 호흡하게 되고, 의식은 살아 있으나, 생기가 극도로 눌려 겉으론 죽은 자와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지."
모용왕의 눈빛이 다시금 가늘어졌다.
"그걸 먹고, 배각산을 벗어날 때까지, 둘 다 모두 죽은 것처럼 꾸미자는 뜻이오?"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여러 갈래의 수를 헤아려 둔 책사처럼 한마디 한마디를 느리게 풀어놓았다.
"그 또한 하나의 방도이긴 할 것이오. 허나, 그대가 그 수를 택하는 순간, 모용찬은 영영 그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것이오. 그대가 설령 목숨을 부지해 돌아간다 한들, 훗날 가주의 자리에 오른다 한들, 손에 쥔 증좌 하나 없고 옭아맬 약점 하나 없다면… 어찌 그자의 계략과 지모를 감당하겠소?"
모용왕의 입술이 얇게 다물렸다.
"더구나 그리되면… 본인은 살아남기 어렵소. 청부는 청부대로 그르치고… 본동과의 약조를 깬 자를 끝내 응징하지도 못하게 되니 말이오."
사내는 옥함 위에 얹어 둔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하여… 그대는 반드시 한 번, 내 손에 죽어야 하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초옥 밖의 빗소리가 잠시 멀어진 듯했다.
"결단은 그대가 하는 것이오. 지금 당장, 본인과 생사를 걸고 드잡이질을 하여, 삼공자가 바라는 바를 이루어 주든지… 아니면 한 번 죽고… 산 아래에서 당한 만큼 되갚을 기회를 붙들든지."
말을 맺은 사내는 옥함을 모용왕 쪽으로 밀고 느릿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초옥 밖의 빗줄기를 곁눈질했다.
담장 너머의 인영들은 여전히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그 기만과도 같은 정적은 대놓고 표출하는 살기보다 더 예리하고 더 음험했다.
빗물 또한 여전히 처마 끝에서 쉼 없이 얽히며 산중의 적막을 한층 음울하게 적셔 가고 있었다.
마침내 모용왕은 약을 받아 들었다.
그는 옥함을 쥔 채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을 때, 그 눈동자에는 더 이상 감출 길 없는 독기가 서릿발처럼 어려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귀하를 만난 것은, 이 모용왕에게 천운인 듯하군."
사내는 모용왕의 안광이 전과 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본디 먹구름이란 것은 끝내 바람 한 줄기에 밀려가고 나면 그 후에 남는 것이란 더욱 청명해진 하늘과 피할 수 없는 일광뿐이었다.
배각산에 몰아치는 이 흉계처럼 모용가를 뒤덮은 뇌운이 걷히면 모용가주는 가문을 이을 만한 변변한 후계자를 얻게 될 터였다.
* * *
모용왕이 귀식단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처음엔 조식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어깨를 받치고 있던 힘마저 서서히 풀려 나갔다.
숨은 끊기지 않았으나 맥은 얕아졌고 얼굴에 돌던 생기 또한 빠르게 가라앉아 마치 이미 넋이 떠난 사람처럼 보였다.
사내는 그의 맥과 눈두덩을 짚어 약효가 제대로 돌았음을 확인한 뒤, 검을 뽑아 들었다.
검끝은 급소로 향하지 않았다.
사내는 장부를 교묘히 비껴 가며 겉으로만 치명상처럼 보일 자리 몇 군데를 골랐다.
옷깃을 찢고 살을 찌르자 선혈이 배어나왔다.
깊지 않은 상처였으나 비에 젖은 초가의 어둠 속에선 사람 하나가 격전 끝에 명줄이 달아난 것처럼 보이기엔 충분했다.
사내는 모용왕이 피가 너무 많이 흐르지 않도록 혈을 짚어 멎게 한 후에 모용왕의 몸을 탁자 곁에 비스듬히 기대어 두었다.
이윽고 사내는 탁자 위에 남은 밀서들을 끌어왔다.
혁피를 벗겨내어 장을 한 장씩 훑으며 금번 청부와 직접 얽힌 것만 따로 골라 모용찬의 신분패와 함께 모용왕의 상투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나머지는 미련 없이 화롱불에 가져다 댔다.
불길은 젖은 공기 탓에 처음엔 더디었으나 한 번 먹빛을 물고 늘어진 뒤로는 쉼 없이 종이를 갉아먹었다.
오래 묵은 약조와 더러운 흉계는 순식간에 검은 재로 오그라들었다.
사내는 마지막 모서리까지 남김없이 타 들어가는 것을 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사내의 손이 붙잡은 것은 철목궁¹⁶이었다.
궁신은 젖은 불빛 아래서도 묵직한 윤기를 잃지 않았고 활줄은 한 번 당겨 보기만 해도 범상한 무인의 힘으론 길들일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모용왕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이건 가주이신 부친께서 물려주신 것이오. 내 비록 궁시에 재능이 없어, 이런 보물에 의지해 위엄을 세우려 했으나, 귀하에게는 더없이 안성맞춤이겠군."
본디 이런 보물은 손에 쥔 자보다 그것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자를 만나야 비로소 제값을 했다.
사내는 활을 들어 무게를 재고 손가락으로 궁현을 가볍게 튕겨 울림을 들었다.
짧고 탁한 울음이 초옥 안의 적막을 얇게 긁고 지나갔다.
사내는 곧장 움직였다.
먼저 문짝을 닫아 안에서 빗장을 걸었다.
이어 무너져 내린 초가의 들보와 썩은 판자를 끌어와 출입구 안쪽에 덧대었다.
누가 함부로 들이칠려 하면 한 번쯤 애를 먹을 만큼은 만들어 두어야 했다.
그런 다음 지붕 아래 가장 비가 덜 스미는 자리를 골라 썩은 나무와 엉킨 볏짚을 조금씩 걷어 냈다.
바깥에서 보면 낡은 흉가가 비바람에 더 허물어지는 모양새에 지나지 않았으나 안쪽에선 사람 하나가 몸을 숨긴 채 사위를 내다볼 수 있는 좁은 틈이 하나둘 생겨났다.
밖은 여전히 빗소리로 가득했다.
수림을 후려치는 물줄기와 대지를 내려치는 천둥 소리가 쉼 없이 엉겨 웬만한 인기척쯤은 죄다 삼켜 버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포위한 자들은 아직 바깥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다.
초옥 안에서 누가 살아 나와 달아날 가능성도 경계했겠으나 더 큰 관심은 혹시 모를 외부의 난입이나 비 틈을 타 산중을 오르는 움직임에 쏠려 있었다.
그래서 하나같이 나무 밑이나 기둥 곁에 붙어 시선을 초옥 바깥과 산길 쪽으로 흩어 두고 있었다.
사내는 첫 화살을 걸었다.
내공이 궁신을 타고 천천히 실리자 철목궁은 짐승의 등줄기처럼 미세하게 휘었다.
숨을 한 번 가다듬고 지붕의 틈 너머로 보이는 가장 가까운 음영을 향해 겨누었다.
그 자는 무너진 담장 곁 느티나무에 등을 기대고 비를 피해 서 있었는데 몸은 바깥을 향해 있었고 옆얼굴만 겨우 드러나 있었다.
사내는 궁현을 풀었다.
폭우 한복판이라 화살이 날아드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다만 다음 순간, 화살은 비에 젖은 나무껍질을 뚫고 그 자의 목울대를 사선으로 꿰뚫었다.
그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젖은 흙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사내는 곧장 다음 화살을 걸었다.
사내는 서두르지 않았다.
공력을 실은 화살 한 대마다 숨 하나를 죽이고 고개 하나를 기울이고 쓰러지는 몸이 바닥에 닿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다음 활을 당겼다.
사내가 생각하기로 이러한 침착함이야말로 살수가 응당 가꿔야 할 미덕이었다.
배각산의 비는 오늘 사내의 편이었다.
포위진은 그렇게 안쪽부터 하나씩 허물어졌다.
스무 명.
사내는 끝내 그 수를 채웠다.
그리고 동시에 셋 넷이 연달아 꺼지자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는 기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 무렵엔 이미 늦어 있었다.
사내의 마지막 화살이 담장 너머로 반쯤 몸을 감추고 있던 자의 젖은 단복과 속살을 함께 뚫고 들어가 명치를 박살 냈을 때, 초옥을 둘러싼 빗속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남은 것은 처마를 때리는 빗줄기와 비에 젖은 시신들이 하나둘 진탕에 얼굴을 묻은 채 무너져 있는 광경뿐이었다.
배치로만 보면 포위진은 아직도 살아있는 셈이었으나 실상 그 안의 살기는 전부 죽어 있었다.
사내는 활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나 이제 막 배각산에 드리운 뇌운 아래의 첫 고리 하나를 도려낸 참이었다.
다만 너무 고요히 살행이 이루어져 아무도 이변을 쉽사리 깨닫지 못한 채 흘러갔을 뿐이었고 남은 자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빗속의 신형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해 쏘아졌다.
서로의 기척을 더듬으며 초옥으로 몰려든 이들은 열.
그들은 더는 바깥을 살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살의를 안으로 겨눈 채 빠르게 포위를 좁혀 왔다.
사내는 철목궁을 내려놓고 검을 뽑았다.
먼저 축축하게 내려앉은 초가 위로 기어오른 둘이 있었다.
젖은 볏짚 위에서 아래로 번지는 살기를 읽은 사내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손목을 비틀어 검끝을 위로 튕겼다.
검기가 두 줄의 섬전처럼 치솟았다.
불귀의 객들이 빗물에 섞여 흘러내리자 곧장 문짝이 박살 나며 안으로 둘이 들이닥쳤다.
사내 또한 들보에서 들이닥치듯 궤적을 쏟아 쳐 불청객 하나의 몸을 갈랐다.
둘째 검은 다른 하나의 턱밑을 갈랐다.
둘이 연달아 쓰러지자 남은 여섯은 차마 초옥 안으로 뛰어들지 못한 채 문턱 밖 빗속에서 사내를 마주했다.
사내가 초옥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자 조장¹⁷급으로 보이는 살수 둘이 먼저 신형을 날렸다.
하나는 좌편에서 다른 하나는 우편에서 파고들었다.
좌우에서 달려드는 그들의 손목이 튕기자 회선하는 암기들이 빗줄기 사이를 헤집고 사내의 후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동시에 후미에 남은 둘은 진창을 딛고 위를 잡았고 나머지 둘은 정면에서 보법을 맞춰 들이쳤다.
흡사 팔인합격술¹⁸을 보는 듯한 다각의 공세였다.
검과 암기가 찰나에 한 점으로 수렴하며 빗속의 초옥 앞을 통째로 염라처럼 죄어 왔다.
그러나 사내는 도리어 검을 거두었다.
검신이 검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손이 검병만을 가볍게 쥐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빗물이 턱선을 타고 떨어졌다.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들이치는 살기와 암수의 경로가 사내의 호흡 안에서 한 번에 정리되었다.
그리고 단 한 합이었다.
검광이 폭사했다.
분명 뇌전을 머금은 먹운은 하늘에 있건만 벼락은 초옥에서 거꾸로 솟았다.
그것은 검이 아니라 산중의 정적 자체가 갑자기 찢겨나가며 여덟 갈래의 뇌광이 된 듯 보였다.
뒤에서 회선하던 암기들과 위를 잡았던 둘은 사내에게 닿기도 전에 몸이 허공에서 반으로 어긋났고 정면의 둘은 미처 검을 뻗지도 못한 채 목에 혈선 하나씩을 남긴 채 고꾸라졌다.
좌우에서 들이치던 살수들은 허리째 날아갔고 남은 반신은 비스듬히 기울며 진창으로 미끄러졌다.
그 모든 변고가 실로 사내가 한 번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은 것은 여전히 초가를 후려치는 빗소리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사내만이 오롯이 고독하게 서 있었다.
사내는 검신을 털어 피를 씻은 뒤, 다시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심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무르구나… 너무 물러…"
사내의 시선은 곧 젖은 시신들로 내려왔다.
"당금의 살계¹⁹는 너무도 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단 말이지."
사내는 마치 제 업이 아닌 것처럼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런 거사를 도모하려면, 진천뢰²⁰ 하나쯤은 품고 왔어야 하거늘… 비장의 수도 하나 없이, 검으로만 결착들을 보려하니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라네."
사내는 혀를 차며 한동안 빗속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내려다보았다.
핏물은 흙탕물에 풀려 검붉은 자취만 남긴 채 황토로 스며들고 있었고 빗줄기는 죽은 자들의 얼굴을 무심히 씻어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이윽고 한 손을 품속으로 넣었다.
사내가 꺼내 든 것은 위급한 때에 불꽃을 쏘아 올리는 작은 화통이었다.
모용왕에게서 넘겨받은 화신통이었다.
사내는 그것을 꺼내 든 채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은 배각산의 산세를 여전히 낮게 누르고 있었지만 걷혀 가는 번갯기 너머로 희미한 먹빛만이 감돌고 있었다.
사내는 화신통의 뇌관을 짧게 비틀고 빗물이 안으로 스며들 틈도 주지 않은 채 곧장 하늘로 쏘아 올렸다.
그리고 귀를 찢는 듯한 귀곡성 같은 소리가 배각산의 먹빛을 길게 갈랐다.
주홍빛 불꽃이 꺼지기도 전에 사방의 초목과 젖은 암벽들에서 인기척이 연달아 들썩였다.
족히 일백에 가까운 기척이 빗소리 사이로 서로 겹쳐 초옥으로 몰려왔고 흩어져 있던 세가의 검들은 삽시간에 사내를 향해 조여들었다.
사내는 빗속에서 그 기척들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얼굴엔 다급함도 진력을 다 토해낸 자의 피로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끊던 냉랭한 낯빛은 어느덧 먹빛과 뒤섞여 무디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사내는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검이 손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 짧고 젖은 소리는 이 배각산을 뒤덮고 있던 피비린내 나는 살업의 끝을 알리는 소리처럼 낮게 번져 나갔다.
사내는 검을 줍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몸 옆으로 늘어뜨린 채 몰려오는 기척들을 향해 그대로 몸을 세웠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빗소리를 뚫고 터져 나왔다.
"이공자를 찾아라! 이공자께서 위험하시다!"
뒤이어 수십의 보법이 진창을 짓밟으며 초옥을 에워쌌다.
하산을 위한 화신통은 충분히 제 구실을 다했고 이제 남은 것은 산 아래에서 누가 진정으로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 가려내는 일뿐이었다.
* * *
모용가는 깊은 상중에 잠겨 있었다.
흰 등롱들이 높게 흔들렸고 회랑과 전각마다 검은 비단과 삼베가 함께 드리워져 본디 음침하던 세가의 기와 위에 다시 한 겹 눅눅한 흑도의 빛을 덧씌우고 있었다.
가솔들 가운데에는 머리에 삼베를 두른 자도 있었고 검은 옷자락을 여민 채 눈물 자국만 닦아 내는 자도 있었으며다.
모용가의 식객들은 저마다 침통한 낯으로 입을 다문 채 대연무장 가장자리에 줄지어 서 있었다.
양주²¹의 양민들 또한 적잖이 몰려들었다.
흑도라 하나 모용가가 양주에서 차지한 위세가 워낙 고상하니 구경을 하러 오는 이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더러는 진심으로 곡을 하러 온 얼굴이었고 더러는 큰 집안의 상가에선 고깃국 한 그릇쯤 떨어지리라 여긴 걸방도²²들도 섞여 있었다.
애도와 군침이 뒤엉킨 인파가 빗물에 젖은 대연무장에 검푸르게 고였다.
그 한복판엔 모용왕의 관이 놓여 있었다.
검은 목관은 배각산의 그날처럼 젖은 먹빛같이 무거웠고 그 앞에 피워 둔 향은 바람 한 줄기에도 끊어질 듯 가늘게 흔들렸다.
검은 비단으로 짜인 족자엔 영정 속 모용왕의 얼굴이 아직 살아 있을 적의 기백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 앞에 선 친지들의 눈빛은 이미 죽은 자를 향한 슬픔보다 남은 자들의 노여움으로 더 짙게 흐려져 있었다.
한혈검왕²³은 한참을 그 광경 속에 서있었다.
상복 위에 검은 피풍을 걸친 그의 몸은 거악처럼 꼿꼿했고 늙었으되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관록이 위엄 어린 눈썹 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식의 상을 치르는 아비로되 그 얼굴엔 넋 놓은 비탄보다 더 깊고 더 무거운 심사가 가라앉아 있었다.
분노였다.
마침내 한혈검왕이 입을 열었다.
"본가주의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다."
모용개의 음성이 대연무장 위로 천천히 깔렸다.
웅성임도 흐느낌도 목멘 곡성도 그 앞에 절로 잦아들었다.
"백발이 검은 머리를 묻는 것은 본디 천륜을 거스르는 비애라 하였거늘… 이제 본가주가 자식의 관 앞에 서서 그 말을 제 입으로 읊게 되었구나… 심히 통한스럽고, 심히 원통하도다."
그의 시선은 관에서 떠나지 않았다.
허나 심중에 품은 검의는 분명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모용왕은 비록 본가주가 본 자식들 가운데 둘째였으나, 본가를 떠받치는 기둥이기도 하였다. 그런 아이가 간악한 흉도들의 손에 스러졌으니, 오늘 본가주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단지 아비로서가 아니라… 세가를 이끄는 가주로서 이기도 하다."
말끝에서 비로소 모용개가 몸을 돌렸다.
두 눈은 대연무장을 메운 가솔들과 상객들 그리고 양민들을 고요히 쓸고 지나갔다.
"본가주는 오늘, 자식의 영전 앞에 죄인의 수급을 바쳐, 그 넋을 기리고자 한다."
그 말이 떨어지자 사위의 공기가 눈에 띄게 굳었다.
그 순간, 좌중은 알아차렸다.
오늘의 이 자리가 죽은 자를 보내는 상일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피가 흐르게 될 자리라는 것을.
모용가의 권세가 결단코 거저 쥐어진 것이 아니며 흑도삼가²⁴의 한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새겨질 자리라는 것을.
검은 옷자락 아래로 검병을 쥔 손들도 얼어붙듯 긴장했다.
모용개는 대연무장 좌우에 늘어선 단주²⁵급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뇌옥에 가두어 둔 그 살수 놈을 끌어내라."
모용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맺었다.
곧바로 모든 단주들이 허리를 숙여 응명을 올렸고 모용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신형을 돌려 뇌옥으로 향했다.
돌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무겁게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옥 쪽에서 사슬 끌리는 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나왔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몰렸다.
사내는 멍에를 목에 두른 채 끌려오고 있었다.
모진 고신을 겪은 상흔이 봉두난발과 전신에 맺힌 어혈로서 절어 있었고 발끝은 돌계단 아래에 이르기까지 핏물을 함께 끌고 왔다.
그럼에도 사내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끌려오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을 끝내 제 발로 옮기고 있었다.
대연무장에 모인 인파를 지나쳐 사내가 웅전²⁶ 앞 석계에 이르렀을 때, 모용개 또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말없이 허리의 검병에 손을 가져갔다.
검집이 밀려나며 검신이 드러났다.
서늘하고 얇은 백광이 흐린 햇빛과 상등의 그림자를 한데 베어 내며 서서히 위용을 드러냈다.
모용개가 한혈검왕의 별호로 강호를 호령하던 시절부터 성명처럼 따라다니던 소정검²⁷이었다.
그 무정한 애병²⁸이 예리하게 빼들린 채 석계를 한 걸음씩 내려왔다.
사내 또한 뒤에서 떠미는 손에 의해 혹은 제 발로 한 걸음씩 계단을 올랐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서로 다른 층계로 향하던 두 인영이 마침내 모용가의 웅전 앞 석계 한가운데서 마주했다.
곧 사내의 무릎 뒤를 누르는 발길질이 들어왔다.
사내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찧었다.
목에 걸린 멍에가 기울어진 채 무겁게 흔들렸다.
그 순간에도 사내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만은 여전히 꺾이지 않은 채 정면의 모용가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연무장은 숨을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모용찬도 그 정적 속에 서 있었다.
소매 끝은 입가를 가리고 있었고 안광엔 웃음기가 진득하게 걸려 있었다.
그에게 있어 실로 다행인 것은 좌중의 눈들이 모두 머지않아 형장이 될 자리에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인들의 눈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모용찬의 눈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은근한 희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모용가주의 눈은 그의 삼남이 바라 마지않는 대로 참척지통에 잠긴 부친의 눈이라기보다 혈채를 갚으려는 한혈검왕의 눈이었다.
이윽고 모용개가 소정검을 비스듬히 세운 채 사내에게 물었다.
"남길 유언이 있느냐."
사내는 곧장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입가에 맺힌 핏물을 혀끝으로 훑어 삼켰다.
그러고 나서야 아주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사마귀가 눈앞의 매미를 잡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참새가 뒤에서 저를 노리고 있음도 모르는도다²⁹."
낮게 잠긴 사내의 음성은 대연무장 한복판에서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울렸다.
모용개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듯 미간을 좁혔다.
내려치려던 소정검마저 반 치 앞에서 멎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주 낮고 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관을 중심으로 양옆에 갈라선 인파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더 명백한 기침이 향이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영정 뒤에서 정적을 갈랐다.
모용왕의 관이 움직였다.
한순간,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상등의 불꽃만이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용찬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뜨였고 모용개 또한 비로소 시선을 돌렸다.
기침은 거기서 멎지 않았다.
관 안에서 살아 있는 생자의 맥동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이내 덮개가 틀어졌다.
관뚜껑이 한쪽으로 밀려나고 안에서 모용왕이 몸을 일으켰다.
낯빛은 창백했고 수의 자락은 아직도 관 속의 냉기를 머금고 있었으나 두 눈만은 분명 온기를 잃지 않은 산 자의 것이었다.
비명이 터졌다.
"귀, 귀신이다!"
걸방도들 몇은 국그릇도 놓친 채 뒤로 물러났고 식객들과 양민들 사이에선 누군가 넘어지고 누군가 짓밟히는 소리가 연달아 일었다.
"모용가의 둘째 아들이, 원한이 깊어 관을 깨고 나왔다!"
열병해 있던 무인들 또한 대경실색하여 혼란이 삽시에 번져 나갔다.
검도 들지 않을 원혼을 막아서야 할지 옛 도령의 고혼 앞에 검집을 닫아야 할지도 쉬이 가늠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혈육들이 움직였다.
"왕아!"
모친이 울부짖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륜의³⁰에 생을 의탁한 모용천도 모용현의 부축을 받으며 불구가 된 몸을 내밀었고 얼굴을 면사로 가린 모용화 또한 휘청이는 걸음으로 관 앞까지 다가들었다.
살아 돌아온 이를 만지는 손길엔 기쁨과 믿을 수 없다는 떨림이 한데 얽혀 있었다.
그 난장한 와중에도 모용찬만은 마치 한겨울의 서릿발을 뒤집어쓴 듯 꼼짝 없이 굳어 있었다.
불과 찰나 전까지만 해도 소매자락 뒤에 감추어 두었던 그 찢어질 듯한 미소는 어느새 바람 앞 등불처럼 흔적도 없이 꺼져 버렸다.
모용찬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눈앞의 광경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모용왕은 모친과 형제들이 붙드는 손길을 부드럽게 떼어 내었다.
그것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생환한 자의 나약한 몸짓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변사의 경중을 꿰뚫어 보는 엄정한 절도가 서려 있었다.
그는 금세라도 무너질 듯 비틀거리는 몸을 억눌러 바로 세웠고 이윽고 높지는 않으나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는 음성으로 장내를 향해 외쳤다.
"아버님, 멈추십시오! 소자가 밝힐 말이 있사옵니다!"
모용왕은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석계를 밟아 위로 올랐다.
수의 자락이 메마른 돌계단을 스치며 길게 끌렸으나 그의 걸음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대연무장에 운집한 중인들은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모용개는 여전히 검을 손에 든 채 그를 맞이하였다.
얼굴 위로 스쳐 간 것은 놀람이었으되 그보다 앞서 억지로 눌러 세운 위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이더냐."
그는 눈빛을 싸늘히 가다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살아 돌아온 것을 본 이상, 아비로서 기쁘지 않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이렇듯 해괴한 소란으로, 네가 세가를 뒤흔든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니라. 둘째야, 네가 살아 돌아온 연유가 무엇이든, 오늘 이 대연무장을 뒤집은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모용왕은 지체 없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 책임까지도 모조리 소자가 짊어지겠사옵니다. 허나 그에 앞서, 소자가 어찌하여 죽은 사람처럼 관 속에 누워 있어야 하였는지, 또 오늘 이 흉사가 대체 누구의 손에 의해 꾸며졌는지만은, 아버님과 이 자리에 모인 만인들 앞에 소자가 낱낱이 밝혀야 되겠사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대연무장에 운집한 군중은 어수선하던 기색마저 거두고 홀린 사람들처럼 일제히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 서 있는 것은 사람들 틈 속에서도 유난히 창백한 낯빛으로 돌기둥처럼 굳어 있던 모용찬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모용왕의 눈빛은 한없이 냉랭하게 식어 있었다.
오롯이 그 눈에 담긴 것은 제 숨통을 노렸던 폐륜아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냉엄한 결의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머리를 틀어 올렸던 상투를 풀어 내렸다.
질끈 동여맸던 머리카락이 한순간에 흩어져 내리며 어깨를 덮었고 그 속에 감추어 두었던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모용찬의 신분패였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살문과 결탁하여 음험한 약조를 꾸민 정황이 낱낱이 적힌 밀서였다.
신분패를 알아본 가솔들 사이에선 한차례 큰 파문이 일었고 누구 하나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모용왕은 말없이 시선을 눅눅한 수기 위로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한 자 한 자 짓씹듯 분명한 음성으로 밀서에 적힌 비사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표적, 모용왕. 신분, 모용가의 차남."
장내가 술렁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낮게 한숨 비슷한 숨을 삼킨 뒤, 다시 밀서를 펼쳐 들었다.
"연유, 모용가의 삼남 모용찬이 가주 계승의 문제로 본동에 의뢰를 넣음."
그 대목에 이르자 모용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 끝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용찬을 향해 있었다.
"모용가의 막내이자 오남인 모용현이 빙전단의 인력을 증원할 뜻을 품고 있으니, 의뢰인의 청에 따라 그쪽으로 숨어들어 대면할 것. 이후의 방략은, 의뢰인이 소상히 일러 줄 것임."
읽으면 읽을수록 담담하게 이어지는 음성은 오히려 그렇기에 좌중의 귓전에 또렷이 남아 장내를 더욱 싸늘히 식혀가고 있었다.
모용왕은 종이를 내렸다.
대신 손에 쥔 신분패를 높이 쳐들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내보였다.
"본공자의 손에 쥐어진 이 신분패가 누구의 것인지, 이곳에 모인 자들 가운데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오."
손에 들린 신분패와 밀서를 좇아 한데 모였던 중인들의 시선이 다시금 모용찬에게로 쏠렸다.
"셋째… 이제 네가 스스로 진상을 밝히겠느냐. 아니면, 본공자가 네 대신 이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 내려가야겠느냐."
모용찬은 말이 없었다.
두 눈은 시뻘건 핏발이 선 채 오직 모용왕의 손안에 들린 제 신분패에만 못처럼 박혀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그는 이윽고 눈을 감았다.
움켜쥔 주먹이 잘게 떨렸고 턱 언저리에 불거진 근육이 몇 번이고 구렁이처럼 넘실거렸다.
그러던 끝에 그는 마침내 길고도 깊은 숨을 한 번 토해 내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터져 나오는 듯한 광소를 대연무장 위로 울려 퍼뜨렸다.
"하하하하…!"
그 웃음은 패색을 감추려는 허장성세라기보다 제 수가 완전히 읽혀 대국이 전복된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침통함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소리였다.
모용찬은 그렇게 한참이나 기막힌 심사를 웃음으로 쏟아내다가 겨우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둘째 형님… 형님은 평소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인하시지. 사람을 품는데, 사소한 흠은 못 본 체 넘기고… 설혹 밑의 것들이, 조금 어긋나더라도 쉽게 의심하지 않으니… 허나, 이 모용찬이… 미처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한 형님의 장점이 더 있었나 보오."
그는 입가에 남은 웃음을 닦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좋소, 내가 졌소. 그래… 완벽하게… 완벽하게 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리다."
참패의 시인 끝에서 모용찬은 문득 미심쩍은 점을 더듬듯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의혹이 꼬리를 물어 모용왕 한 명에만 머물지 않은 채 다른 이에게로 향했다.
모용찬의 눈길은 석계를 한층 한층 더듬어 오르더니 여전히 무릎 꿇려 있는 사내에게 가서 멎었다.
그리고 모용찬은 알아차렸다.
장계취계의 수로 결착이 지어진 이 대국이 오롯이 형제의 수완으로 뒤집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에 모용찬의 입에서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과연 그러했군! 어쩐지… 이 일이 온전히, 둘째 형님의 머리에서만 나온 것 같지가 않더라니…"
그는 사내에게 눈을 둔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먼저 침명동³¹, 그대들과의 약조를 어긴 탓이니 이제 와 무어라 탓하겠소. 이 모용찬, 비록 심계가 악랄하다는 평을 들을지언정… 제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추태를 부리는 소인배는 아니오."
그 말이 끝나자 대연무장엔 다시 한 번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용개는 한동안 말없이 셋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손에 들고 있던 소정검을 거두어 검집에 넣었다.
그 맑고도 차가운 쇳소리가 장내를 갈랐다.
곧 조문차 발을 들였다가 명복을 빌어야 할 이를 잃은 채 어정히 머물던 상객들에게 우렁찬 음성이 울려 퍼졌다.
"오늘 본가에 모여, 본가주의 둘째 아들의 넋을 기리고자 발걸음 한 중인들에게 먼저 사과를 구한다. 본디, 이러한 자리는 망자의 넋을 편히 보내고, 산 자의 비통을 가라앉히는 자리거늘. 집안의 수치스러운 사정이 드러나, 이토록 해괴한 소란을 빚었으니, 가주 된 자로서 면목이 없다."
억눌린 음성은 불길을 재 속에 묻어 둔 화로처럼 낮고 무거웠다.
"허나, 오늘 이 자리에서 드러난 흉계는, 한 집안의 사사로운 다툼으로 덮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혈육을 죽이려 살문과 내통하고, 본가를 기만한 자가 있다면, 이는 마땅히 천도를 거스르고, 집안의 뿌리를 좀먹는 역천의 죄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도다."
모용개는 좌우에 시립한 단주들과 가주 직속의 한혈단³² 그리고 웅전 앞 둘레를 에운 모든 가솔들에게 차례차례 시선을 얹었다.
"모용가의 가솔들과 무인들은 전부 본가주의 명을 받들라! 이번 일에 연루된 자들을 남김없이 밝혀내라. 셋째 놈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 역천의 도당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잡아내어, 엄히 문초하라. 그리고 모용찬은 지금 이 순간부터 더는 본가주의 자식이 아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모용찬의 얼굴 위로 씁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모용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냉연히 마지막 명을 내렸다.
"저자는 제 형제를 죽이려, 본가를 뒤엎을 흉계를 꾸민 역천패륜의 죄인이다. 당장, 뇌옥에 끌고 가라. 이후의 모든 죄상을 낱낱이 밝혀, 대모용가의 기강이 아직 준엄히 살아 있음을, 강호의 동도들 앞에 공고히 할 것이다."
수일이 지나자 양주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차남의 상중 괴사는 삽시간에 천하 만방으로 번져 나갔다.
모용가의 둘째 아들이 관을 박차고 일어나 셋째의 패륜을 만인 앞에 드러냈다는 소문은 저잣거리의 입방아를 넘어 강호인들의 귓전까지 파고들었다.
양주의 양민들은 그날, 대연무장에서 벌어진 변고를 두고 귀신이 망자를 일으켰다느니 원한이 넘쳐 명부도 거슬렀다느니 저마다 혀끝에 유언비어를 얹었으나 정작 모용가는 그러한 풍문이 더 퍼지기 전에 더욱 신속하고 노골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이번 거사의 주모자였던 모용찬을 위시하여 그와 결탁한 단주들과 대주들 나아가 삼공자와 연을 댄 자들까지 모조리 색출하여 뇌옥의 가장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또한 양주 일대에 뿌리내린 살문들의 연통책이며 금전 몇 푼에 손발을 빌려준 밑바닥 잡배들까지 남김없이 쓸어 담아 모용가로 끌고 왔다.
그것은 죄인을 추포하는 일인 동시에 만천하에 아직 모용가의 위세가 건재함을 드러내는 과시이기도 했다.
하여 양주 성시에는 오랫동안 혈풍이 가시지 않았고 모용가의 문턱을 드나드는 자들은 이전보다 더욱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 * *
모용가주가 집무를 보는 웅전 안은 넓고 높았다.
세월의 숨결이 배인 장중한 기둥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었고 그 수렴 끝에 자리한 상석에는 절로 사람을 공손케 하는 위엄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내는 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몸엔 아직 고신의 자국이 남아 있었고 뇌옥의 눅눅한 건초향 또한 미미하게 배어 있었다.
"침명동이 본가의 일에 관여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본가주도 진즉 알고 있었다."
모용개는 그 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가볍게 짚었다.
"장남의 일도… 넷째 아이의 일도… 그 밖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더러운 수작들도… 본가주가 모른 체한 적은 있어도, 아예 몰랐던 적은 없다."
사내는 대꾸하지 않았다.
모용개는 그런 침묵을 탓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침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입매를 올렸다.
"본가주는 대모용가의 가주로서, 자식들을 오래도록 살펴 왔다. 셋째는 비록 지모가 뛰어나고, 셈을 따져 피를 보는 일도 주저하지 않을 만큼 담력 또한 높았다. 허나, 그 심지가 지나치게 매몰차고 냉혹하였다. 사람을 제 바둑돌처럼 부리는 걸 즐기고, 제 손에 쥔 것조차 소중히 않는 자는 장차 강한 가주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집안을 오래 쥘 그릇은 되지 못한다."
언뜻 그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냉랭하였으나 이미 손에서 놓쳐 버린 자식을 향한 쓰디쓴 체념도 함께 스며 있었다.
"반면, 둘째는 포용력이 있고, 성정이 너그러워 사람을 품을 줄을 알고, 제 아래를 돌볼 줄 알았다. 허나, 그러한 기질은 장차 강호에 나가면 대협³³이란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언정, 무정하지 못해 검을 빼야 할 자리에도 손을 망설이고, 의심해야 할 자리에도 믿음을 주는 우행을 낳기 십상이다. 다만, 이번 일을 겪고 깨달은 바가 있을 것이다. 사람을 품는 것과 사람에게 먹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품을 자와 내쳐야 할 자를 가리지 못하면, 결국 제 피로 값을 치른다는 것을 말이다."
모용개는 여기서 말을 멈추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이 웅전의 허공을 떠돌다가 이윽고 사내에게로 천천히 옮겨졌다.
가주로서 후계의 그릇을 논하던 눈빛이 잠시 자식을 해한 원수를 마주한 아비의 것으로 바뀌었다.
"본가주로서는 그대들을 증오해야 마땅하다. 침명동이 본가의 장남을 불구로 만들었고, 넷째 아이의 미색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겼으니, 자식을 둔 아비로서 어찌 피가 거꾸로 솟지 않겠느냐."
그러나 사내는 털끝만치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잠잠히 자신에게 쏟아지는 분노를 받아들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용개는 그런 사내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끝내 낮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비의 노기가 채 가시지 않던 눈빛이 어느새 가문의 흥망을 저울질하는 가주의 것으로 돌아왔다.
"…허나, 가주는 아비와는 다르다. 가주란 자리는 증오만으로 집안을 이끌 수는 없다. 장남과 여식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패악을 저지른 원수들의 문파라 하나, 본가주는 그 안에 그대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사실 또한 보았다. 제자를 보면 그 문파를 알 수 있다고, 본가주는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 같은 인물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이라면, 침명동이란 살문 또한 본가주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재주를 감추고 있을 터이니…"
모용개의 시선이 사내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하여, 본가주는 대모용가의 가주로서 따로 셈을 쳐야 한다. 그대들의 공으로 셋째의 흉계가 드러났고, 둘째가 살아 돌아왔으니, 장남과 넷째 아이에게 남긴 혈채, 그 혈채를 본가주는 당장 갚으라 하지 않겠다. 이는 본가주가 그대들을 용서해서가 아니다. 침명동이 본가에 빚을 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모용가에 진 빚을 갚아라. 장차 가주가 될 모용왕의 곁에 힘을 보태라. 본가주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새로운 가주가 제 자리를 굳히기까지 그 등을 향해 겨눠질 암수들을 먼저 꺾어 내라는 뜻이다. 본가주는 쓸 만한 검을 공연히 부러뜨리는 취미가 없다. 침명동주가 영민하다면 본가주의 제안을 모욕으로 여기진 않을 것이다."
모용개는 쓰임이 다할 때까지는 멍에를 느슨하게 풀어 줄 뿐 당장 벗겨 줄 생각은 없다는 듯 마지막 말을 맺었다.
"돌아가 전하라! 대모용가의 가주, 모용개가, 본가가 눈을 감아 주는 대신, 그대들 또한 장차 대모용가의 행로에 한 발을 얹는다. 그것이 이번 일을 덮는 조건이다."
사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는 뇌옥에서 풀려났다.
그것은 결백이 밝혀진 자의 석방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지만 적어도 마음 한켠이 묘하게 후련했다.
사내는 제 손끝에서 빚어진 살예³⁴가 얼마나 정묘하고 절륜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제 손으로 입증해 냈기 때문이었다.
모용가주가 붙잡은 것은 달이 아니라 수면 위에 비친 월광에 불과했으나 사내는 구태여 그것을 걷어 내지 않았다.
무릇 강호에선 진상을 드러내는 것보다 잘못 짚은 판단을 그대로 두는 편이 훗날에 더 요긴하게 쓰일 때도 있는 법이었다.
¹ : 排角山
² : 慕容家
³ : 胡服
⁴ : 公子
⁵ : 氷電團
⁶ : 暗幕
⁷ : 群盜
⁸ : 日氣
⁹ : 凍靈隊
¹⁰ : 隊主
¹¹ : 火信筒
¹² : 黑道
¹³ : 龜息丹
¹⁴ : 冥府
¹⁵ : 毛穴
¹⁶ : 鐵木弓
¹⁷ : 組長
¹⁸ : 八人合擊術
¹⁹ : 殺界
²⁰ : 震天雷
²¹ : 洋州
²² : 乞幇徒
²³ : 寒血劍王
²⁴ : 黑道三家
²⁵ : 團主
²⁶ : 雄殿
²⁷ : 消精劍
²⁸ : 愛兵
²⁹ : 螳螂捕蟬黃雀在後
³⁰ : 輪椅
³¹ : 沈明洞
³² : 寒血團
³³ : 大俠
³⁴ : 殺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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